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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공평이 정확히 구분 안 되는 세속 생활

2014. 3. 18.



하버드 대학교 강의 ‘정의 (Justice)'를 바탕으로 쓴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한 일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반드시’ 정의가 아니라는 얘기에 당황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샌델 교수가 사례들을 ‘정리’한 것일 뿐이지,

실제로는 우리도 여러 분야에서 의문을 가졌던 사항들입니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땀 흘려 갈무리를 해서 편안한 겨울을 보내는데,

노래만 부르며 일하지 않은 베짱이는 겨울에 먹을 게 없어서

개미네 집으로 동냥을  간다는 얘기이지요.


이때 굶주린 베짱이에게 자선을 베풀어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선하고, 가톨릭 정신에 맞는 정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적선을 하면 베짱이가,

겨울에도 동냥이 잘 되니 굳이 애써 일할 것 없다고 생각해서

영원히 거지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므로,

동냥을 주는 것이 오히려 베짱이를 잘 못 길들여,

자립의 기회를 빼앗는 옳지 못 한 일이라는 의견도 마땅해 보입니다.



우리네 세속 생활에서는 이러한 모호한 ‘정의’가 수없이 지속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만 가르칩니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에제키엘 18,)



하느님 말씀에 나오는 대부분의 예화들에서는

‘공정과 정의’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정의인 줄 알고 불의를 행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일부러 온갖 역겨운 짓을 하는 보통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공장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쏟아져 나오는

외국의 도시를 부러워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업화 초기에는 우리도 마구 공해를 생산해 냈었습니다.

이제와 다시 보니 그런 것들은 역겨운 짓이 되었습니다.



정의 문제에 공평이 겹쳐지면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국가발전과 자녀양육에 헌신해 온 노고’에 보답하기 위하여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모두에게 다 주는 것이 공평합니까,

아니면 부유층을 제외시키는 것이 공평합니까?

부유층의 기준은 해마다 달라질 것이고,

자녀는 부유해도 본인은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소득이 유리 상자처럼 투명한 봉급생활자는

정해진 세금을 꼬박 내는 반면에,

소득이 아주 많은 전문 업종 종사자들은

그렇지 않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거액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근로자가 아니라면서

세금을 안 내겠다고 수십 년 동안 버티는 직종 종사자도 있습니다.

세금을 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든 제도가 공평치 않습니다.



이렇듯 애매한 정의, 공정, 공평 속에 사는 우리에게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신중히 생각해서 자신의 주관으로 정의 공정 공평을 가름하여 실천하고,

그 결과에 대한 판결은 하느님께 맡기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향 설정은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