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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다섯 성인과 5백여 순교자가 치명한 갈매못 성지

 

  천수만을 바라보는 갈매못 성지-01.jpg     

                                    <천수만을 바라보는 갈매못 성지>

 

충청수영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섯 성인은

다음날인 1866330(음력 214)

10리 떨어진 "바닷가 모래사장" 갈매못으로 가서 군문 효수형을 당했다.

다섯 성인은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

(집옥재 6. 신리 성지 - 2. 2017. 02. 23 참조),

오메트르 신부(집옥재 2. 오메트르 신부의 손골 성지.  2016.10.31.),

위앵 신부(집옥재 6. 신리 성지 - 2. 2017. 02. 23.),

황석두 루카 회장(집옥재 6. 신리 성지 - 2.  2017. 02. 23.),

배론 신학당 건물을 희사한 장주기 요셉

(집옥재 14. 안팎이 다 아름다운 요당리 성지 2017. 10.21.) 의 다섯 분이다.

 

순교성지 갈매못홈페이지는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영보리와 갈매못의 약사(略史)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영보리의 영보(永寶)는 말 그대로 영원한 보물이고,

  갈매못은 영보리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여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그러므로 갈매못은 갈마연에서 온 이름이다.

  그 이름만으로 영적인 곳이다.

  이제는 목마른 말이 아니라

  지친 현대인들이 생명의 물을 마시는 생명의 땅이기 때문이다.]

    

기념관 앞 청동상-02.jpg

                          <기념관 앞 청동상>

 

두산백과 등의 사전에는 영보리의 한자가 永保里로 나와 있다.

永寶里로 표기된 곳은 찾지 못하였다.

뒷산이 갈마음수형이라서 멀리 떨어진 해변을

갈매못이라 부른다는 것도 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내 나름대로 갈매못의 유래를 아래처럼 구성해 보았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갈매개흙(갯바닥이나 늪 바닥에 있는

  거무스름하고 미끈미끈한 고운 흙)의 방언이라고 돼있다.

  , ‘대전교구 - 보령 갈매못 성지에는

  ‘앞바다가 좌우의 육지와 섬으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 같아 보이는 데서

   갈매못의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서술되었음으로 보아

이곳이 보령의 이름난 개흙과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갈매와 연못의 을 합쳐서 갈매못이 된 것이다.}

 

십자가의 길-01.jpg

                                              <십자가의 길>

 

갈매못에는 나루(津頭)가 있었는데,

갈매의 한자 갈마(渴馬)와 합쳐 갈마진두(渴馬津頭)로 표기해 왔다.

지금은 수영 서문을 나오면 바닷가로 길이 뚫려 있지만

옛날에는 뱃길밖에 없었으므로, 성인들은 남쪽 들길을 걸어

험준한 술재를 넘어 갈매못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들이 처형된 후, 황석두의 시신은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鴻山 : 충남 부여 지역의 옛 지명)

남포(藍浦 : 충남 보령시 남포면)의 서재골로 이장되었으며,

(서재골 혹은 석죽골 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현재 지명은

  보령시 미산면 서짓골이다.)

18823월 블랑 신부(Blanc, Marie Jean Gustave 1844~1890.

한국명 백규삼 白圭三. 7대 조선교구장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45월 다시 조선으로 모셔 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1967년에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대전교구 : 보령 갈매못 성지>

 

다섯 성인은 한양에서 충청수영으로 끌려가는 도중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함께 기도한 후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때 그 바위는 1973년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

'복자 바위'라고 불리다가

1984년 다섯 분이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로 개명되었다.

 

  오성바위에서의 기도 - 갈매못성지 기념관 전시-02.jpg

          <오성바위에서의 기도 - 갈매못성지 기념관 전시>

 

성인들 이외의 순교자로는,

충청도 신창 출신 박 베드로, 거더리에 살던 손치양 사도 요한,

공주 서면 사람 이영중, 충청 덕산의 이 발토로메오, 임운필이

증언록’, ‘치명일기등에 의해 확인되었고,

아직 밝혀내지 못한 분들도 5백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갈매못이 성지로 다시 태어난 데는

1924년 충남 부여 금사리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량(鄭奎良 레오, 1883~1952) 신부의 적극적 노력이 바탕이 되었다.

 

정신부는 1925, 공주성당 5대 주임 최종철 말구(마르코) 신부와

최신부의 동기동창인 충북 괴산 고마리(높은 사랑) 성당 윤의병 신부와 함께,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몰래 파서 이장한 이들과

목격 증인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성인들이 참수당한 자리,

머리를 걸었던 긴 깃대 자리, 임시로 매장한 구덩이들을 확인한 후

그 땅 20평을 사들여 천주교 재단에 귀속시킨 것이다.

('갈매못성지' 누리방 약사)

 

  다섯 성인 상-01.jpg

                                                <다섯 성인 상>

 

1913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21번째 사제가 된 정규량 신부는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 은(바오로, 1804~1866.

집옥재 13. 가정성화의 은총을 비는 단내성지 2017.09.21.)

증손자로, 순교자들에 대한 애정과 신심이 깊어서,

배론성지 보존, 공세리 성당에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 건립 등

순교자 현양에 많은 업적을 쌓았고, 교육사업에도 열심하였다.

 

최종철 말구 신부는 1921년 공주성당(나중에 공주 중동성당)

5대 주임으로 부임, 1936년 중국인 기술자들을 초치,

직접 벽돌을 찍어내어 1937512일 아름다운 건물을 완공시켰다.

 

병인박해 순교자 윤자호 바오로의 6대손인 윤의병 신부는

기해박해 백주년인 19391월부터 19506월까지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잡지 경향잡지에 연재돼

수많은 신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군난(窘難) 소설

은화(隱花 알려지지 않은 순교의 꽃)’의 작가이다.

군난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이르는 말로, 교난(敎難)이라고도 한다.

(두산백과)

고마리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자 1923년 숭애의숙이라는 강습소를 열어

6~12살 어린이들에게 국어 산수 노래 교리 등을 가르쳤다.

 

다섯 성인과 5백여 순교자들의 피가 흐른 갈매못은

1968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간선도로가 정비되고,

조경과 건축이 진척되어

오늘에는 말 그대로 벽해상전(碧海桑田)의 아름다운 성지로 조성되었다.

 

  갈매못성지 대성당 제단-01 -스테인드 글라스가 열리면 바다가 바로 나타난다.jpg

    <대성당 제단 - 스테인드 글라스가 열리면 오천항 바다가 눈앞에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