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972 추천 수 0 댓글 0

 

26. 옹기 굽던 교우촌 - 갈곡리 성당과 신암리 성당

 

  갈곡리성당-01-01.jpg         

                                                   <갈곡리 성당>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 시대가 지나고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 정순대비(貞純大妃)서교(西敎)는 사교(邪敎)’ 라 규정하여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禁壓令)을 내렸고,

이는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어져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살던 교인들은 관헌의 추포를 피해

강원도 충청도 등지의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이들 중 일부가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豊水院)으로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을 이루었다.

 

그러나 교우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추적의 목표가 되었고

부득이 새로운 산 속을 찾아 도피하는 신도가 늘어났다.

110년여 전, 풍수원과 홍천 지역을 벗어나

북한산 북쪽의 깊은 골짜기로 이주한 이들이 살던 마을이

갈곡리(葛谷里)와 신암리(神岩里)이다.

 

 

갈곡리성당-03-01.jpg

                                                <갈곡리성당 성모상>

 

 

갈곡리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坡州市 法院邑)에 있는 마을로

260m의 노적봉 아래에 있는 산골이다.

칡이 많은 골짜기라 하여 칡울 또는 칠울이라 한데서

갈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두산백과>

 

6·25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고개는 20여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로 불렸다.

 

박해를 피해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진 우골

( 양주시 광적면 廣積面 우고리 遇古里 :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라는 설과,

  여러 개의 골짜기가 만난다는 뜻의 우곡리(遇谷里)에서 유래했다는 설,

  『호구총수(戶口總數), 1789에 나오는 광석면 우곡리(牛谷里)

  우고리로 변천되었다는 설이 있다. - 향토문화전자대전 등)살던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이곳 칠울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칠울 공소 홈페이지>

 

 

갈곡리성당-02-01.jpg

                                           <갈곡리성당-칠울공소 건립비>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현 서울 중림동) 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1년 송도(개성) 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되었고,

1923년 신암리 본당, 1934년 덕정리 본당, 1947년 의정부 본당,

1963년 법원리 본당 공소로 관할이 바뀌다가

현재는 갈곡리 성당(파주시 법원읍 화합로466번길 25)이 되었다.

 

오랜 가톨릭 역사에 걸맞게 이곳에서는 많은 성직자가 배출되었다.

한국인 첫 수도자 사제인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도 갈곡리 출신이다.

1914년생인 김치호는 구교우 집안으로 아버지와 형은 옹기장이었고,

병인박해 때는 어머니 등에 업혀 감옥생활을 했다고 한다.

1926년 서울 백동(柏洞 현 혜화동) 베네딕도회에 입회,

이듬해 수도원이 덕원(德源 함남 문천·원산 지역의 옛 지명)으로 옮기자,

신학생으로 진로를 바꾸어 1942년 사제품을 받아

덕원본당 보좌를 거쳐 1945년 주임신부가 되었다.

 

북한 땅이 공산화 되자 1949년 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에 억류되었다가

1950105일 평양을 비우고 후퇴하는 인민군들에 의해

각목에 맞아 순교했다.

누나 김 마리아 수녀도 1017일 피살되었다.

 

    

갈곡리성당-04-01.jpg

                                                                <갈곡리 성당 성전 >


 

 경기도 양주시 남면의 감악산(紺岳山) 아래에 있는 신암리(神岩里)

이름 자체에서 종교와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 마을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감악산 바로 밑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호구총수(戶口總數), 1789에서는 이곳을

적성군 남면에 속한 신암리(新巖里)로 소개하였다.

1914년 적성군 남면이 연천군 남면으로 개편되었고,

19459월 파주군에 속하였다가

19462월 남면 주민들의 요청으로 양주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양주군은 2003년 양주시로 승격되었고

관할이 여러 번 변경되면서 이름도 새로울 신()’에서

귀신 신()’으로 바뀌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옛 신암리 공소 전경-01.jpg

                                                <옛 신암리공소 전경>

 

 

1909년 이곳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되었다.

당시의 신자는 3백여 명이었다.

 

19253월 본당으로 승격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 해

1930년 본당은 폐지되고 다시 행주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59년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었고,

2008년 준본당이 되었다가 2013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 감악산로489번길 27-32. 신암리 264-3)

의정부교구는 2018년 이 성당을 이춘근 라우렌시오 순교자 기념 순례지로 지정했다.

 

 

  신암리성당-01-01.jpg                                                 <신암리성당>

 

이춘근(李春根 1915-1950) 라우렌시오 신부는 1915년 신암리에서 태어나

1939년 명동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사목활동을 하던 중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여 1942년 첫 서원을 했다.

 

194810월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사제를 청하자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이 신부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평양 서포 본당 주임신부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지도 신부로 활동하던 중

공산당의 횡포가 심해지자 평양 외곽의 순안 공소로 피신했으나

1950625일 체포되어 105일 평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춘근 신부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의 일원으로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

 

  신암리 성당-02-01.jpg

                                               <신암리성당 성전>

 

 

한편 2008105일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신암리 출신인 서울대교구 이경훈(李庚薰)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새 성당과 순교자 박 다미아노의 집(교육관 및 사제관)을 새로 건립하였다.

 

평안도 박천 출신의 박 다미아노는 박해를 피해 강원도로,

다시 당진으로 이주했다가 체포되어 해미 감영에 압송되었다.

함께 갇힌 12명을 대상으로 마지막 신문(訊問)이 행해졌다.

십자가를 내려놓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방면해 준다는 것.

한 사람이 부양할 식솔이 많다고 십자가를 밟았다.

11명은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감격의 눈물로 이승을 떠났다.

이를 본 배교자도 후회하고 회개하여 순교자를 뒤따랐다.

 

    

 박 다미아노의 집-01-01.jpg

                                             <박 다미아노의 집>

    

 

박 다미아노가 마지막으로 참수 당했다.

여동생과 딸이 숲속에 숨어서 이를 지켜보았다.

다음날 시신을 수습하여 소나무 아래 묻었다.

그 후 증손자 박복선 파비아노(1918년생. 33년간 신암리 공소 회장 역임)

해마다 벌초하러 찾아갔었다.

어느 해에 보니 그 주위에 새로운 산소가 많이 생기고 지형이 바뀌어서

증조부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박 다미아노는 잊혀진 순교자가 되고 말았다.

박 파비아노의 외손자인 이경훈 신부가 어머니 박정순 헬레나의 증언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신암리 공소 설립 1백주년을 기념하여

새 건물을 지어 봉헌하게 되었다.

<이경훈 바르톨로메오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