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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구절을 백 번은 읽어야

2013. 4. 22.

 

 

후한(後漢) 말 헌제(獻帝, 재위 189~220) 때부터

삼국시대 위(魏)의 명제(明帝) 조예(曹叡, 재위 227~239) 때까지 활동했던

동우(董遇)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늘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며

독서에 힘썼습니다.

 

<노자(老子)>나 <좌전(左傳)>에 주(注)를 달았는데,

특히 좌전에 대한 주석이 널리 알려져

당나라 시대까지 폭넓게 읽혔다고 합니다.

 

그가 주석을 써 넣을 때 붉은 빛깔의 주묵(朱墨)을 사용했으므로,

이때부터 ‘주묵’이라는 말이 어떤 글에 대한 주(注)나 가필(加筆),

첨삭(添削)을 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우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움을 청하자 그는 “마땅히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한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必當先讀百遍, 讀書百遍其義自見)”며

사양했습니다. <두산백과>

 

주자(朱子)도 독다자연효(讀多自然曉 - 읽기를 많이 하면 절로 뜻이 밝혀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시어사전>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문장도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런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런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27 필리포스가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을 만났다.

28 --- 그는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30 필리포스가 ---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필리포스를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물었다.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35 필리포스는 ---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사도행전 8>

 

 

에티오피아의 고관이 그 구절을 백번 읽지 않아서

이해를 못 했는지,

그 구절은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이에게 물어보면 단판에 답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국보’라고 자칭하던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가 소년시절

영어를 독학할 때, ‘삼인칭’이라는 말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읽고 또 읽어도 모르겠어서 결국은 눈길 30리를 걸어 가

읍내 보통학교 신임 교원에게서 설명을 듣습니다.

“내가 일인칭, 너는 이인칭,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溲馬勃-소 오줌, 말똥)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우리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쉬운 말을, 혼자 깨우치려면 백번 읽어도 모를 만하겠습니다.

같은 구절을 자꾸 읽다보면, 처음에 이해한 내용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단판에 넘어가지 말고, 여러 번 거푸 읽어서

다른 의미가 있는지 음미하라는 것이 ‘독서백편 의자현’의

또 다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혼자 읽지 마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만큼 깊어서 잘못 이해되기 쉽다는 것이겠지요.

 

뜻 모를 구절에 부딪치면, 우선 혼자 백번을 읽고,

교우들과 의견을 나누고, 그래도 혼란스러울 때는

전문가들이나, 성직자들에게 묻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