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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1 11:55

조선 말기 생활상 

조회 수 565 추천 수 0 댓글 1

조선 말기 생활상 

17, 18세기 조선 후기부터 중세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여러 부분이 동요되면서

중세 사회의 구조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신분제의 동요, 유학자들의 주자학적 사고 방식에 대한 이반, 붕당정치의 전개, 개혁을 주창한 정조의 승하로 

순조가 11세 나이로 임금이 되자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세도정치로 이어져

농민들은 많은 괴로움을을 겪었고

밀려드는 외세의 압력 등으로 대원군이 쇄국정책과 개혁을 주도하였으나

일본이 조작한 운양호사건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19세기 초엔 세도정치, 후기엔 일제의 지배로

민초들은 그야말로 피폐한 삶을 살아갈 수밖엔 없었다.

아래 화보에서 보여지듯 혼인 등 풍습에서는 앞에 들러리를 세웠다는 게 이색적이고

탄압과 굴욕의 시대에서도 끈끈한 삶의 의지를 펴는

조상들의 삶의 현장을 보는 거 같아 연민이 온다.

- 평보

 

100년 전 한국(조선)을 소개합니다.

이 사진은 호주의 사진작가 조지 로스가 촬영한 것입니다. 
100년 전 인천의 명칭은 제물포였습니다. 
다음은 교보문고가 출간한 조지 로스의 사진집
'호주 사진가의 눈을 통해 본 한국 1904 Korea throuth Australian eyes'입니다.

 

호주 작가의 눈에 비춰진 1904년의 부산 번화가

 

서울 근교 풍경

 

서울 장날 풍경

 

사진연구가 정성길 씨 소장품ㅡ 장승(1903년)
장승은 마을 어귀에 세워놓고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 
또한 장승 앞에서 병의 치유를 빌던 풍습이 있었다.

​ 

신행길(1890년)
방금 시집으로 가려는 가마를 잡고 친정어머니는 딸에게 무엇인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여자궁도대회(1910)

 

기생 소릿꾼(1900년). 지금의 가수

 

기생의 나들이 (1903년)
전속 가마꾼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신랑 신부의 상면(1903)
신랑의 가족들이 호기심으로 신부를 보고 있으나 
신부의 가족들은 근심이 가득하다.

 

시집으로 가는 신부(1903)
가마를 탄 신부가 신랑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구한말 결혼식(1903)
떠구지머리를 얹고 큰 머리를 튼 후,
떠구지 댕기를 드리우고 큰 비녀를 꽂은 다음,
원삼을 받쳐 입고 혼례를 올리고 있다.
이 부부는 자식을 낳은 후 미국 선교사에 의해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다.

 

마을 장승(1900)
장승은 2개 세우는 법인데 마을 입구에 장승 하나가 외로이 서있고 마을로 통과하는 전신주가 보인다.

 

다듬이질 하는 여인.

 

키질과 체질(1890)
우리 여인들의 생활은 노동에 시달렸으며 곡식을 찧고 키로 까부리며 체질하여 밥과 죽을 쑤었다.

 

연자매(1900)
연자매는 맷돌을 소가 끌어 돌리게 하는 정미시설이다.

 

맷돌(1904)
콩이나 메밀 등을 넣어 갈아주는 수동식 믹서기다.

 

돗자리 짜는 노인(1900)

 

기녀 위문(1905)
러일전쟁 당시 기녀들이 일본군 막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쪽 천막에 일장기와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토담 쌓기(1905)
나무틀에 돌과 진흙을 혼합해서 쌓고,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휴식하고 있다.

 

김개남(1894)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을 이끌고 봉기했다.

​ 

널뛰기(1920)
한말 때 여자가 바깥구경을 할 때에는 널을 뛰어 담장밖 세상을 구경했다.

 

장기(1890)
어린 소년처럼 보이나 초립을 쓴 것으로 보아 
이미 장가든 모습이다.

 

한강여객선(1910)

 

남대문 전차 대기소(1919)
서울에 전차가 들어오면서 단발령 시행에 실패한 일본은
전차회사 직원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했다. 
서양식 모자를 쓰게 하므로서 전차가 몰고 온 개혁 바람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바꾸어 놓고,
운전수는 강제로 일본식 제복을 입혔다.

백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헌(엄비)왕비 국상 시기이다.

 

서울의 전차(1903)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워크의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1898년 12월 전기궤도 부설공사가 완공되었다. 
준공 직후 소아 사고로 전차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지만 각지로부터 전차를 타보기 위해 서울로 몰려왔다.
정원은 40명이고, 중앙에는 양반이 이용하던 특실이 있었다.

​ 

]

마님 나들이(1907)
가마꾼이 마님을 태우고 포목점 거리를 지나고 있다

 

마포 나루터(1910)
많은 새우젓 장수들이 있고 상권이 모여있는 선착장 주변이다.
서울 도성까지 얼마 안 떨어져 항구에서 많은 물량이 거래되고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용산-인천 배삯은 상등은 2원 하등은 70전이며 증기선이 운항되었다.

 

경인선 기차(1910)
기차를 처음 타본 승객들은 기차가 정지하기 전에 뛰어내려 사고가 많았다.

 

소방대 발족(1920)
왼쪽 높은 망루에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긴급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1904년 개화기의 졸업식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두 훈장(선생님)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서있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당.
 

인천 일어학교(1894)
한국인 교사와 도포 입은 학생 중앙에 일본인 교사도 보인다

 

학동들의 야외학습(1904)
서당 밖에 나와 야외학습을 하고 있는 광경.

 

서당 풍경(1909)
훈장이 회초리를 들고 청마루에서 붓글씨를 감독하고 있다.

 

북간도! 서당(1905)
어두운 방에서 플레쉬 없이 촬영한 것이 신기한 듯 한결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이화학당(1910)
이화학당을 설립한 "서클랜드 부인"은 오른쪽에서 가사실습을 감독하고 있다.
앞줄에 신발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특색

 

여학교 실습(1910)
대구 동산 언덕에 있는 선교사 저택에서 실습 나온 신명여학생들이 소년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부(1930)
대구 덕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일본식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 촬영 중 

 

동대문 성벽에서 성문 밖을 찍은 듯한 풍경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신기한지 아이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동대문입니다. 역시 아이들이 성벽 위에 올라와 있군요.

 

노인들이 남대문에 올라가 담소하는 듯한 모습

 

남대문 안쪽의 모습입니다. 장이라도 섰는지 많은 사람들이 배추 같은 채소 지게를 내려놓고 있습니다.

 

1880년대 당시의 남대문

 

1880년대의 남대문 중앙로
조선시대의 길거리를 가운데 두고 늘어선 초가집

​ 

"Namdaemun"(Great South Gate in Seoul) Date: 1904
Collection: Willard Dickerman Straight and Early U.S.-Korea Diplomatic Relations,
Cornell University Library

Willard Dickerman Straight 

 

1931년 박흥식(朴興植)이 서울 종로(鍾路)2가에 세운"화신 백화점"
당시 한국의 랜드마크적인 존재로 일세를 풍미했다.
화신백화점은 1987년에 문을 닫았고
1988년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되어 1999년 그 자리에는 미국 건축가 설계로 
"삼성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1935년 서울 남대문
왼쪽의 상업은행과 오른쪽 중앙 "레토크림"(レ-トクレ-ム) 화장품 세로 광고탑
오른쪽 "기린맥주"(キリンビ-ル) 가로 광고

 

 

 

 

 

 

 

 

  • 笑泉 2021.06.23 12:28

    참, 귀중한 자료일세.
    정말 다른세상이군! 상상을 초월하는 정경이군.

    소설이나 사극에서 보고 상상하던 광경은 이에 비하면 낙원일세.

    흑백사진이어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