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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휼륭한 조망, 아름다운 건축의 공세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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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리 성당>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길 10)의 이름은

이곳이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관리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공세창은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창고로,

청주와 천안 등 40여 고을에서 수납한 세곡을

선박을 이용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1523(중종 18)에 개설됐던 이 창고는

고종 때 폐지되어, 80칸 건물이 헐리고

1897년 그 자리에 공세리 성당과 사제관이 세워졌다.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후 박해를 겪는 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 고장에서 배출되었다.


    

순교자 묘지.JPG                                                       <순교자 묘지>

 

이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에 나오는 박의서 사바(1808~1867)

<세례명은 사바스라고도 표기돼 있음>), 박원서 마르코(1817~1867),

박익서(1823~1867, 세례명 미상) 의 삼형제 순교자 묘가 있다.

이들은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 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

박원서의 부인 이 마리아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38일 순교하였다.

<신유 병인박해 공세리 32위 순교자 명단에는 88일로 표기됨.>

 

삼형제의 시신은 당질인 박웅진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920일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되었다.

<대전교구 기록에는 919일로 돼있다.>

 

이 집안에는 삼형제와 이 마리아 이외에도

박인서, 박제환, 박흥갑(박의서 아들),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여섯 분의 순교자가 더 있고,

주변 마을에서도 12명의 순교자가 나왔으며

공세리 성당 성지에는 삼형제 묘소와 함께

스물 세분의 순교자 묘석이 모셔져 있다.

 

박 형제의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경기도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여러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공세리 성당 홈 페이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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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과 사제관>

 

양촌 성당(陽村. 구합덕성당의 전신) 관할 아래 있던 공세리 성당은

18956월 드비즈(Emile Pierre Devise 1871~1933 한국이름 성일론 成一論)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6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했다.

 

신자수가 증가하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108일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시키니

그 크고 화려함으로 아산 지방의 명물이 되어

멀리서 까지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고

요즈음에도 여러 영화의 배경으로 촬영되고 있다.

    

성당-02.JPG

                                                                 <성당 - 02>

 

프랑스 남부 론알프주의 아르데슈현에서 태어난 드비즈는

1894년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1025일 한국에 입국,

18951월 하우고개(현 하우현성당)에 부임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며 한국어와 풍속을 익혔다.

 

같은 해 6월 공세리 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으나

1년 만에 서울 주교관의 코스트 신부(한국명 고의선)가 사망하자

서울 주교관의 경리를 담당하는 당가(當家) 신부라는 중책을 맡아

공세리 성당을 떠났다.

18976월 공세리 성당의 제2대 주임신부인 기낭(한국명 진보안)의 뒤를 이어

다시 제3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뒤 1930년 까지 34년간 사목 활동을 하고

공세리 성당을 비롯한 많은 가톨릭 건축에 직접 설계, 감독으로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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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 03>

 

60세에 이르러 심한 귓병으로 사목활동을 중단하고

공세리 성당을 떠나 서울의 주교관에 거처하면서

교구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건축 관련 일을 맡아보았다.

1932년 성탄 때 몸져눕게 되어 치료차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1933831일 그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산백과>

 

드비즈 신부는 한방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한약을 직접 조제하였으며

새로운 고약을 개발, 그의 한국 이름을 딴 성일론 고약을 만들었고

그 비법을 이명래 요한(1890~1952)에게 전수하여

그 유명한 이명래고약을 탄생시켰다.

    

 성모 동산.JPG

                                                                       <성모 동산>

 

공세리 성당은 이국적 건축양식의 본당과 함께

공세창 때부터 자라 온 우람한 고목들이 어울려

더욱 고풍스러운 운치를 자아낸다.

 

성당을 둘러싼 느티나무, 팽나무, 피나무 등

높이 20여 미터가 넘는 다섯 그루 오랜 나무는

마치 교회의 장로처럼 의연히 서서

300년 이상 이 땅을 보살피고 있다.

    

    DSC01462.JPG       DSC01463.JPG     DSC01461.JPG

                                                               <성당을 지키는 오랜 나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