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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원형처럼 복원된 원주 강원감영


 

포정루-01-01.jpg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布政樓)>


 

감영(監營)이란, 조선왕조 때 각 도의 행정사무를 관장하였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된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전한 이후

전국 행정구역을 8도로 확정하면서 신설되었으며

2품 관찰사(감사)가 수장으로 있었다.

 

이때 강릉도와 교주도를 통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수부(首府)를 원주로 삼았다.

강원도의 감영은 1395(조선 태조 4) 원주에 설치된 후

1896년 춘천으로 옮기기까지 약 500년 동안 그 지위를 지켰다.

위치는 원주시의 한 복판인 원주시 일산동 54-2.

 

감영의 업무는 행정사무, 농어업, 상업, 치안, ·형사재판 등 법무, 군무 등이다.

감영의 관리들과 도 산하의 군현 수령들이 관찰사의 지휘로

맡은 일을 수행하였으며

관찰사는 도민을 다스리고 예하 관리들을 관리 감독함에 있어

비위 사실 유무를 자의로 판단하여 처벌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한을 행사했다.

<나무 위키>


 

중삼문-관동관찰사영문.JPG

                   <중삼문(中三門). ‘관동관찰사영문(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고유명을 가지고 있다. 관찰사를 만나러 들어가는 문.’>

 

 

1814년 전국적인 기근이 들었을 때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과 지방관이

1815년에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다.

강원도 울진에 살던 김강이(金鋼伊 시몬. 일명 여생. ?~1815)

그 동생 김창귀(金昌貴 타대오) 형제가 18154월에 체포되어

원주 강원감영으로 이송되어 왔다.

<원주교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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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삼문(內三門). 고유명은 징청문(澄淸門).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문을 들어서라.>

 

 

 복자 김강이 시몬

 

충청도 서산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강이(金綱伊 :

가톨릭 사전에도 강철 강-이 아닌 벼리 강-으로 표기됨)

신자가 된 후, 동생과 함께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산(高山面-전북 완주군)으로 이주했다.

 

여기에서, 박해를 피해 지방 교우촌을 순방하던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더욱 믿음이 강해져 고산 지역에서는 유력한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신자 몇몇과 함께

경상도 머루산(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이후 울진으로 이주했으나 하인의 밀고로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 수감되었다가 원주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원주감영에는 1815년 초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대개는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고

동생 또한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함으로써

전라도 보성(寶城)으로 유배되었다.

김강이만이 고문에 굴하지 않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문의 상처에 이질까지 겹쳐 1815125(115) 옥사했다.

이로서 1815년 을해년에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일어난

을해박해(乙亥迫害)형식상 종결되었다.

 

김강이 시몬은 원주에서 순교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병인치명사적’ (917~18)에 의하면,

김 시몬의 둘째 아들 김양범(1804~1867 빈첸시오)

병인박해 때인 18679월 수원에서 치명했으며

손자 김선행(1828~1867 필립보)은 이보다 앞선

1867년 가을에 잡혀 순교했다.

<가톨릭사전. 두산백과>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816일에 광화문 광장에서

김강이 등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을 거행하고,

그들의 기념일을 529일로 선포했다.

김강이는 순교 2백년이 다 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전례력으로 복자를 기념하는 날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는 것이나

124위의 다수가 12월과 1월에 해당되는데,

다른 축일들과 많이 겹치므로 개별적으로 지정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서울대교구, 대구대교구, 전주교구 순교자들의 순교일이 많은

5월로 택월하고,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가 소속된

전주교구의 다수 순교자가 순교한 529일로 결정한 것이다.

<천주교 주교회의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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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당(宣化堂). 관찰사의 정청.>


 

기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최해성 요한과 고모 최 비르짓다 복자


1839년 기해박해 때 원주감영에서는 두 신자가 순교했으니

최해성 요한(崔海成 일명 양박)과 그의 고모 최 비르짓다이다.

 

최 요한(18111839)1839년 순교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다.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살던 그의 집안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자

원주시 부론면 손곡2리 서지 마을로 이주하여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교우촌에 선교사가 와서 성사를 베풀 때면 요한은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온순 후덕한 성품과 깊은 신앙심으로 그는 회장에 임명되었다.

견진성사를 받은 후에는 성령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으며,

그의 마음은 순교 원의로 가득 차게 되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요한은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쇠도리깨로 맞는 등 21회의 심문과 18회의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배교하면 풀어준다는 유혹을 받았으나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의()를 위해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향했다.

옥에 갇힌 지 8개월 후인 그해 96(729)

참수형으로 치명(致命) 하여 복자품에 올랐다.


 

내아-01.jpg

     <내아(內衙). 관찰사 가족의 살림 공간. 1759년 영조 35,

      내아에서 관찰사의 노모와 가족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해 준

          임금의 은덕을 기려서 대은당(戴恩堂)이라는 편액을 지었다.>

 

 

복자 최 비르짓다(17831839)

 

최 비르짓다는 신유박해 때 남편이 황사영을 숨겨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남편을 따라갔으나

남편이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원주의 오빠에게로 돌아왔다.

그 오빠가 최해성 요한의 부친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최해성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자

조카를 만나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가 신자임이 드러나 투옥되었다.

관에서는 그녀를 굶겨죽이라고 명령하였으나 죽지 않고 버티었고,

4개월 후에도 죽지 않자 ‘3일 안에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3일 안에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옥리가

그 날 밤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39128(음력 113)9일 밤사이로, 당시 57세였다.

비르짓다가 순교한 뒤, 옥리의 어머니가 갇혀 있던 다른 교우를 찾아가

비르짓다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답니다.” 라고 얘기했다.

<원주교구 홈페이지. 가톨릭사전. 복자 124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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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원>


 

강원감영 건물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렸던 것을

1634(인조 12) 목사 이배원(李培元)이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이중길(李重吉) 목사가 완성하였다.

그 후 1665(현종 6)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선화당과 삼문의 중건에 착수,

1667년 감사 이후산(李後山)이 완성하였다.

고종 때 관찰사 윤병정이 1874년부터 1875년 사이에

대대적인 공사로 건물 43495칸을 보수했다.

 

이후 19506·25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지고 담장이 허물어졌으며,

관풍각이 있던 큰 연못도 메워졌다.

다행히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만은 남아 있었다.

원주시와 원성군 통합 전까지 한때 원주군청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문화재청과 원주시는 1996년부터 감영 복원 정비 사업을 시작,

2000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중삼문 터, 내삼문 터, 공방고,

책방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와

포정루에서 중삼문 터와 내삼문 터를 거쳐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여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 터, 행각터 등과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선화당 뒤편 연못 터인 방지(方池)의 호안석축 등을 찾이냈다.

 

이 유적은 또한,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 건물터 등이

그 아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복원 사업은 23년 만인 2018년 완공을 보아

113일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원주시, 문화재청 홈페이지>


 

 송덕비-01.JPG      최규하 휘호-01-01.jpg

    <송덕비 : 관찰사들은                                                 <선화당 편액 : 대통령들은

        송덕비로 이름을 남기고>                            편액 휘호로 이름을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