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453 추천 수 0 댓글 0


47. 배론성지 2 : 장주기 성인, 세 신부 그리고 황사영


 

 

배론 성지-001.jpg

                                                                       <배론성지>

 

 

 

배론성지의 배는 한글, ( 논할 논)은 한자이니

한중합작의 지명(地名)이라는 게 상당히 어색해 보이고,

어원으로 받아들이기 마땅치 않은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골짜기가 처럼 생겨서 라는 건 그렇다 쳐도

()’ 은 왜 거기서 나와?

그보다는, ‘쌀 논이 들어차 있는 배처럼 생긴 골짜기라는 데서

배논’‘으로 불리다가, 음이 변해서 배론이 되었다고 하면 안 될까?

 

 

배론은 첩첩산중에 위치하고 있지만,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며,

제천으로 해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에,

원주를 거치면 강원도와 통하는 교통의 길목이기도 하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791년에(정조15) 일어난 신해박해 이후로 추정되는데

탄압을 피하고자 숨어든 교우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배론 산골로 숨어들어

농사를 짓거나 옹기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처형되면서

이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배론신학교 - 001.jpg

                                  <복원된 배론 신학당>

 

 

 

배론 성 요셉 신학당

 

1855년 초 메스트르 신부(Maistre ) 등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한편,

방인(邦人) 사제 양성을 목적으로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 요셉(張周基, 일명 낙소-樂紹, 1803~1866)의 집을 빌려

신학당을 설립했다.

 

교장 푸르티에 가를로(Pourthie, 申妖案, 1830~1866)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 미카엘(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장주기는 한문을 가르쳤다.

이 신학교가 현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으로, 격식을 갖춘 최초의 신학교였다.

 

전공은 신학과와 라틴어과로 나누어지고

교과목은 철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가르쳤다.

또한, 동물·식물·지리학·의술 및 과학지식과 일반상식 과목도 있었다.

따라서 이 학당은 단순히 신학생 교육장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민중 교화에까지 공헌하였으며,

당시에는 유일하게 초··고등 교육을 함께 시행한 근대 학교인 셈이다.

 

그러나 1866(고종 3) 병인박해 때 교장 등 많은 교직자가 순교하자

신학생들은 모두 흩어지고 학교는 창설 11년 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 요셉 성당 - 001.jpg

                                      <성 요셉 성당>

 

 

 

메스트로 신부

 

메스트로 신부는 1808년 프랑스 앙트르몽에서 태어나 1832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839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1840년 마카오에 가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쳤다.

조선에 부임하여 1853년 조선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사하자,

1856327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도착할 때까지 교구장 직무를 대행했다.

18571230일 과로로 쓰러져 선종할 때까지

배론 신학교 설립 외에도 조선 최초의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는 등

최양업 신부와 많은 신자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장주기 요셉 성인 - 001.jpg

                <성 장주기 요셉>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3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자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볼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96810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푸르티에 신부 - 001.jpg

               <푸르티에 신부

 

 

푸르티에 신부 (Pourthi, Jean Antoine)

 

푸르티에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12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6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 1855년 중국 구이저우 지방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하였다.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프티니콜라 신부,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프티니콜라 신부 - 001.jpg

             <프티니콜라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프티니콜라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 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3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황사영 동굴 - 001.jpg    황사영 백서-001.jpg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작성한 토굴>                <황사영 백서>

 

 

 

황사영 알렉시오(黃嗣永 17741801)

 

남인 명문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황사영 알렉시오는   .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영리하였다.

179116세, 관리로 발탁될 수 없는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는 풍속에 따라, 국왕이 만진 손목에 붉은 비단을 감고 다녔다고 한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교리를 익히고

정약종 등과 토론을 통해 입교를 결심, 영세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구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글을 비단에 기록한 백서(帛書)를 작성했다.

그러나 백서를 지니고 길을 떠난 황 심(黃 沁)이 관헌에게 체포되니

황사영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에 알려졌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 001.jpg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 인생길은 순례길, 서두르면 안 된다.

                                           어느 과정도 생략할 수 없는 길이다.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걷다 보면 그곳에 다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