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79 추천 수 0 댓글 0

 

51. 배나드리 성지와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배나드리성지 입구-01.jpg

                                                    <배나드리성지 입구의 정자>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용동3리 일대가 배나드리 성지이다.

619번 도로를 남하하면 도로 이름이 ‘삽교평야로’로 바뀌고

이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정자가 나타난다.

거꾸로, 용동초등학교 쪽에서 삽교평야로를 따라 북상하면

천변 우측에 이 정자가 서 있다.

그 정자 아랫마을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이 이룬 교우촌이었다.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이라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부른다.

삽교읍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삽교천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히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하여서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이 지역을 관장하던 해미(海美) 진영의 영장은 현감 겸직으로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4대 박해 이외에도 수시로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투옥하고 사형을 집행하였던 것이다.

 

 

배나드리에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은 1817년 10월(음),

신자 20~30명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으로 끌고 갔다.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손연욱 요셉.jpg

                         손연욱 요셉은 마지막 날 새벽 샘에서 물을 뒤집어쓰고
                          청결한 몸과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에서 - 탁희성 화백 그림.

 

순교자 손연욱 요셉 ( ? ∼1824)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난 손연욱은

1817년 10월(음) 배나드리에서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진영으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6, 7년간 옥살이로 생명의 불이 거의 꺼지자,

관장은 옥 근처의 한 가옥에서 동생과 함께 살게 허락했다.

동생과 함께 몇 주일을 보낸 1824년 어느 날 새벽,

밤샘 기도와 삼종기도를 바친 후 선종하였다.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도 아들이 잡혀간 지 3일 후에 붙들려

해미 진영에서 10여 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중병에 걸렸다.

관장은 그를 집으로 보내어 병이 나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1827년 세상을 떠났다.

 

성녀 김 데레사-103위 성인화.jpg

                    <성녀 김 데레사>

 

손 요셉의 부인 김 데레사 성녀

 

손연욱은 1811년에,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 ~ 1816)의 딸

김 데레사(1796 ~ 1840)와 혼인했다.

<가톨릭 대사전 - 성 김 데레사의 생년에 대해서는

   1797년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성지 홈페이지에는 1779년으로까지 되어 있다.>

김종한은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從祖父) 이니

김 데레사는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김 성녀는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열심한 신자로 교육하며

집안을 모범적인 성 가정으로 만들었다.

남편 순교 후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혼자 집안을 이끌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대제를 지켰고,

염경이나 묵상도 열심히 하며 수계하였다.

1833년 말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상경하여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으며,

앵베르 주교 입국 후에는 그의 살림을 도맡았다.

1839년 기해박해 7월 19일 정 엘리사벳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태장 280대를 맞는 등

여러 차례 혹형과 고문을 당했으나

순교한 조부와 부친의 모범을 따라 꿋꿋이 이겨냈고,

옥에서 만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어린 딸 이 아가다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6개월 동안 갖은 문초를 당하던 그는 1840년 1월 9일

포청 옥에서 이 아가다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

1984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 01.JPG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 01>

 

 

용동3리에서 주민 몇 분을 만나 ‘배나드리 성지’의 위치를 물었으나

아무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사는 집터가 2백여 년 전

순교자의 집 마당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안내판 하나 없는 성지 배나드리,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곳이 옛 교우촌이려니 하는 수밖에.

 

 

‘배나드리성지’ 와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는

흔히 배나드리성지로 혼용된다.

배나드리성지에는 아무런 기념물이 없는 반면

인언민 사적지는 그런대로 잘 꾸며진 탓에

두 군데를 묶어서 이곳을 배나드리성지라고 통칭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비’에는 분명히 배나드리성지인 곳 주민들에게

‘배나드리성지가 어디나?’고 물으면 ‘저 건넛마을에 있다.’ 대답하고

저 건넛마을 다리에서 이정표를 보면 아까 지나온 곳을 가리킨다.

두 동네를 두 번 왕복한 끝에 요행 신자 한 분을 만나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나처럼 고생하기 싫으면, 다시 정자가 있는 619번 도로로 북상

직진하다 용동 2리 버스정류소에서 우측 길로 약 300m 들어가면

용동성결교회가 있고 그 뒤편이 사적지(삽교읍 용동리 270-23)이다.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 02.jpg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印彦敏 1737~1800)는

삽교 지역 최초의 순교자이다.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 복자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을 쌓았다.

어느 날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 천주교를 접하고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했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시작되자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해 목숨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로 끌려갔다.

 

그는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했다.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때려죽이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가져다준 뒤,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큰 돌을 들어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인 마르티노는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 순교했다.

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인언민-001.jpg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인 마르티노는

                    해미로 이송될 때 관리들이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했다.>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는 상룡과 하룡마을이 있는데

신자들은 주로 하룡에 살고 있었다.

하룡에는 공소의 강당이 있었으나

1967년 예산 본당으로부터 삽교 본당이 분리되면서

공소가 폐지되고 강당은 헐리게 되었다.

이때 이곳 신자들은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이곳을 사적지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공소 자체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복자 인언민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