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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온갖 모진 방법의 처형장 해미성지(海美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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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순교성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와 조산리(造山里) 접경 부근의 해미천 주변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을 생매장, 수장, 교수 등

온갖 모진 방법으로 처형하던 형장이었다.

이곳에서 1백 년 동안 순교한 신자는 무려 3천 명으로 추정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까지 해미에서는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 처형되었다.

이후 1839년 기해박해 전까지는 1814년에 옥사한 김진후

(비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를 비롯하여 8명이 목숨을 바쳤다.

1866년의 병인박해 시기에는 122명이 순교했으니

이름이 알려진 132명에 이름 없이 죽은 47명 이상을 더하면,

박해 시기 해미에서 처형된 사람은 179명이 넘는다.

당시 해미읍성의 큰 감옥 두 곳은 항상 신자들로 북적였다고 전해진다.

 

박해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더욱 심해졌다.

조선이 완강한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1866년 병인양요부터 신미양요 직후인 1872년 사이

충청도 각 고을에서 잡혀 온 신자 1,0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생매장되었다.

원래는 해미읍성 서문 밖으로 끌어내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형,

석형(石刑), 백지사형(白紙死刑) 등의 방식으로 한 명씩 처형하였는데,

점차 인원이 너무 많아지자 처형 방식을 생매장으로 바꾼 것이었다.

 

무명 처형자가 많은 이유는 사후에 문책 거리가 될 만한 신분의 사람들을

인근 공주나 홍주로 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순교자는 서민층일 것으로 추정된다.

 

해미는 조선 초기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위치한 곳이었다.

1651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지면서 해미는 현으로 축소되어

1,400~1,5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는 진영으로 바뀌었다.

군사를 거느린 무관 영장은 해미 현감을 겸하였고,

충청좌도의 내포 지방 해안 수비 명목으로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당시 해미 관아의 담당 지역은 충청도와 함께 경기도 평택에 이르렀다.

이 지역의 신자들이 체포되면 모두 해미읍성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들은 해미읍성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마지막에 처형당하는 곳도 해미읍성 서문 밖과

해미성지로 조성된 이곳(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이었다.

<가톨릭 Good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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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숫골>

 

생매장 순교지 여숫골

해미성지는 해미읍성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숱한 천주학 죄인들의 유해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어,

산 채로 묻혔다는 증거가 되었다.

 

묻히던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자진해서 구덩이로 뛰어들거나, 떠밀려 들어갔다.

천주교를 알지 못했던 구경꾼들은 그들의 외침을

‘여수(여우)에 홀린 머리째로 죽어간다.’고 잘못 이해해서

이곳을 "여숫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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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분 복자>

 

인언민 이보현 김진후 3위에 시복

2014년 8월 16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순교자 124위를 복자로 시복했다.

해미 순교자 중 인언민 이보현 김진후 세 분이 포함되었다.

 

인언민 마르티노(印彦敏 1737 ~ 1800. 1. 9)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jpg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신앙의 선조들에서.>

<51회. '배나드리성지와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에 상술됨.>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1773 ~ 1800. 1. 9)

 

                                이보현 프란치스코-한국천주교주교회의-124위 복자에서.jpg

                        <이보현 프란치스코 –

                          천주교주교회의 - 124위 복자에서.>

 

이보현은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20세가 좀 넘어서 고향 인근에 살던 황 심(黃 沁) 토마스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황 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황 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한 프란치스코는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 성사를 받기도 했다.

1797년의 정사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그는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혹독하게 매를 맞았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망나니들은 몽둥이로 불두덩(陰阜)을 짓찧어 절명시켰다.

 

며칠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신앙의 선조들]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8~1814)

 

                                      김진후 비오.jpg

                             <김진후 비오 -

                               천주교주교회의 - 124위 복자에서.>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복판 면천의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50세 즈음에 맏아들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로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 이를 집안에 전하면서 천주교를 접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방면되었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됐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후 해배되었다.

 

김 비오는 1805년 또다시 붙들려 해미로 압송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비오는 사형 판결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비오는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결국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의 옥중 생활 중 제일 긴 기간의 옥살이였다.

 

1816년에는 셋째 아들 한현(漢鉉 혹은 宗漢),

1839년에는 둘째 아들 택현의 아들 제준(濟俊),

1846년에는 제준의 아들 대건이 순교함으로써

32년 동안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신앙의 선조들>

 

 

유해와 유품의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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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 발견 터 – 농부가 처음 유해를 발견한 곳>

 

1935년 서산 본당 바로(Barraux, 范 베드로 1903~1946) 신부의

(본당 재임 1932. 7~1946) 지도하에 발굴을 시작해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을 발견했다.

 

당시에 이미 70여 년이 지난 옛일이었으므로

매장 장소를 알아내기 어려웠으나

다행히 노인 중에 목격자나, 전해 들은 이들의 증언이 있어서

조산리에 묻힌 순교자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다.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에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수십 명으로 짐작되었으나

수습된 유해는 10명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유해는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모셨다가

1995년 9월 20일 발굴터 원위치(현 순교자 기념탑 앞)로

다시 안장되었고, 일부 유해와 유물은 유해 참배실에 보존되었다.

 

시복 기념비-01.jpg                  프란치스코 교황 - 01.jpg

                 <시복기념비>                                    <프란치스코 교황>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성지를 방문,

아시아 주교들과 만난 뒤, 해미읍성에서 폐막 미사를 집전하고

해미 순교성지 기념관 앞에서 복자 3위 시복기념비를 제막했다.

 

범 베드로 신부

바로(Barraux, 1903~1946, 范 베드로) 신부는

1930년 6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1932년 8월 5일 서산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1937년에는 서산 성당을 신축했다.

사목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바로 신부는 어느 날 봉성체 중에

병환 중에 있는 교우가 영하지 못한 성체를 대신 영하고

결국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가톨릭 Good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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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순교자 기념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