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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피로 물든 늪에서 ‘국제성지’로 --- 해미성지-2

 

'생명의 책'과 해미성지-01.jpg

                    <‘생명의 책’과 해미성지 – ‘생명의 책’은 2014년 해미성지에서 개최된

                       ‘아시아 주교회의’에서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남기기 위한 조형물이다. 천주교 박해의 아픈 역사를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염원한다.>

 

‘성지 순례기’의 ‘해미 편’을 쓰는 중에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개막일인 2020년 11월 29일

해미성지가 교황청 승인 ‘국제성지’로 선포됐다는 기쁜 전갈이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주한 교황청 대사관으로부터 전해 받은

이 교령에 따라,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인

2021년 3월 1일 이를 공표했다.

우리나라 성지가 국제성지로 선포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처음이다.

2018년 9월 14일 ‘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아시아 최초로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가 된 데 이은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화신문>

교황청 승인 국제성지는 예루살렘과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그리고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곳과

이탈리아 아시시를 비롯한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 30여 곳이다.

 

 

해미성지인 ‘여숫골’의 성역화 작업은 1985년 4월

해미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면서 시작되었다.

그해 6월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가 발족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홍보,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98년 부지 약 2만 3천㎡를 확보하였고

1999년 5월부터 3천여 회원이 성전 건립 기금을 봉헌했다.

2000년 8월 착공하여 2003년 6월 17일 성지 건립을 완료했다.

 

노천 성당-01.jpg

                                                            <노천 성당>

 

성지의 발견에는 서산성당 주임이었던 범 베드로 신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여숫골의 농부들이 땅을 팔 때마다 인골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범 신부는

병인박해 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다는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생매장지를 확인,

1935년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에 안장한 것이다.

 

 

1995년 9월 18일 순교자 대축일에

유해 및 유골은 원래 있었던 해미로의 이장 작업이 시작됐다.

유골은 세 개의 자기 항아리에 모셨으며,

그중 하나의 항아리에는 진토만을 담았다.

20일, 유해는 해미성지 순교 터(현 순교자기념탑 앞)로 귀환했다.

파묘 장소에는 부장품을 넣은 50cm 높이의 옹기그릇 하나와

진토를 담은 자기 항아리 하나를 모셨다.

부장품은 대형 나무 묵주 하나, 25cm 높이의 성모상 하나,

10cm 정도의 예수 그리스도상 하나였다.

<대전교구 : 해미 성지>

 

                                                       순교자들의 묘와 기념탑-01.jpg

                                                     <순교자들의 묘와 기념탑>

 

2003년 6월 해미성지에는 새 성당이 건립되었다.

소성당과 대성당은 순교자들의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구조로 설계되었고,

성당 뒤편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 참배실을 따로 지었다.

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순교성지 기념관-01.jpg

                                                   <순교성지 기념관>

 

기념관 안에는 유해 일부와 여러 가지 잔인한 사형 장면을 그린 그림,

세 분 복자의 초상화 등 기념품들이 전시돼 있다.

 

유해와 유물 - 기념관-01.jpg      여러 모진 사형도 - 기념관-01.jpg

                         <유해와 유품>                                              <모진 사형 장면>

 

 

당시 순교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와

문초를 받다가 장형(杖刑)에 못 이겨 치명한 예도 많았다.

그러나 처형할 신자들이 많아지자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산 사람들을 밀어 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묻어버리거나.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

돌에 메어치거나 몽둥이로 쳐 죽이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다 저질렀다.

 

진둠벙-01.jpg

                                                              <진둠벙>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혈하를 이루던 서문 밖 사형 터는

대량의 사학죄인을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에 처형하려고 벌판에서 집행하였는데

죽이는 일과 사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가는 길에 큰 개울이 있고(해미천) 개울을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다리 밑에 물길에 팬 둠벙(웅덩이의 방언 - 전라, 충청)이 보이면

두 팔이 묶여 끌려오는 죄인들을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이

‘죄인 둠벙’이라 부르던 것이 오늘날에는 줄여서 ‘진둠벙’이 되었다.

<대전교구 : 해미 성지>

 

자리개 돌-01.jpg

                                                                <자리개 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국제성지’는 대부분 훌륭한 순교 성인이 있거나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 등인 데 비해서

해미성지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모신 성지라는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참된 성직자나 뛰어난 업적을 이룬 위인들도 잘 모셔야 하지만

배움도 모자라고 힘없고 고달픈 가운데에서도

믿음의 끈을 굳게 잡고 천국으로 떠나간 이들을 기리는 해미성지를

국제성지로 지정한 것에서 가톨릭의 참모습을 본다.

 

해미천과 진둠벙교-01.jpg

                                                 <해미천을 가로지르는 진둠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