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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예당호수를 피로 물들인 봉수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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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수산성지 대흥형옥원>

 

대흥 봉수산성지는 홍성군과 예산군을 가르는 봉수산(鳳首山 483.9m)이

아름다운 예당호수와 만나 이루는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이었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대흥군(大興郡)으로 개칭하고,

조선 시대에 대흥현으로 낮추어 1413년(태종 13) 현감을 두었다가

1896년 다시 대흥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덕산군(德山郡)과 통합하여 예산군(禮山郡)이 되면서

성지가 있는 일대는 예산군 대흥면으로 남아,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다.

 

대흥군은 홍주목(洪州牧)과 공주목(公州牧)을 잇고,

호남 - 충청도 서남 지역 – 한양을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성지 자리에 관아(官衙)가 설치된 것이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선교사와 신자들이 예산과 홍주, 공주, 청양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거나,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천주교도가 잡혀 와

관아 동헌에서 문초를 받고, 옥에 갇혔으며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배교를 거부한 이들은 형장에서 순교했다.

 

지금까지 기록상 밝혀진 대흥 순교자는 김정득 베드로 한 분뿐이지만,

수많은 신자의 영(靈)과 육(肉)이 예당호(禮唐湖) 찬 물 속에서

자신들의 행적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수집해 작성한 「치명일기」(致命日記)에 따르면

대흥 고을 출신 순교자는 김 베드로 외에도 황 베드로, 백청여, 원지우 안드레아,

이 루도비코, 이 아우구스티노, 원 요셉 등 7위가 기록되어 있다.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 대흥 봉수산 순교 성지>

 

 

 

복자 김정득 베드로(金丁得 Peter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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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득 베드로>                             <성물을 땅에 묻는 김 베드로>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인이 되었다.

<가톨릭 대사전. 두산백과>

 

신유박해 때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茂城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 실천에 전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김 베드로를 배교시키려고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했으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 김정득과 김광옥은 각각 청주로 이송되어 다시 만났다.

그들은 옥중에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형벌과 고통을 견디어 냈고,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선고문에는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고 씌어 있었다.

 

‘고향에서 참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두 ‘의좋은 순교자’는

김 안드레아의 고향인 예산까지 함께 걸었다.

기쁨에 가득 찬 두 사람은 헤어질 시간이 되자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김 베드로는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갇히었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석차

201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여사울’ 출신의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김광옥 안드레아-01.jpg          김광옥 안드레아 면장-01-01.jpg

        <김광옥 안드레아>                         <면장 김광옥 안드레아>

 

 

예산 여사울의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 안드레아(金廣玉 1741~1801)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으로 일했다.

그는 성격이 지나치게 사나워서 모두 그를 무서워했다.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날마다 교우들과 한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 시기마다 금식재(禁食齋)를 지켰고, 갖가지 극기 행위와 교리를 실천하며

드러나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는 성격이 어린양처럼 바뀌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김정득과 함께 체포되어 예산, 청주를 거쳐 한양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선고 내용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면서

제멋대로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였다.

 

김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다.

형장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누였다.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이었다.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들이다.

 

 

봉수산 아래에 새로운 성지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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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관아>

 

대전교구는 2015년 8월 19일 봉수산 아래에 새로운 성지를 지정했다.

대흥과 예산에서 순교한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의 신앙과 성덕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된 성지이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 동서리 105-3 대흥면사무소 옆)

 

이곳은 대흥 관아가 있던 곳이다.

예산군 지역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관아 건물은 대흥 관아뿐이다.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거의가 다 해체, 매매되어 없어지고

동헌(東軒)과 아문(衙門)만이 남아있다.

'동헌'이란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인데

보통 생활처소인 내아(內衙 서헌이라고도 함)의 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동헌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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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관아 동헌>

 

동헌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상량문에 1407년에 지었다고 쓰여있고,

1703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때 대흥이 군으로 승격될 당시 중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건물은 대흥현이 예산군에 통합되면서

대흥면 사무소로 개조하여 해방 후까지 사용하다가

면사무소를 그 옆 부지에 신축하면서 1979년에 해체, 복원한 것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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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아문>                                     <임성아문 - 현판>

 

아문의 현판은 대흥의 옛 이름을 따서 임성아문(任城衙門)이 되었다.

동헌 뒷마당에는 흥선대원군이 새운 척화비가 있다.

외세의 상륙과 천주교 전파를 막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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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화비>                                   <동헌 뒷마당과 봉수산>

 

 

 

새롭게 재현된 대흥형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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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형옥원>                  <형옥원 –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형옥원(刑獄圓)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

고신(拷訊 고려·조선 시대에 행하여진 법률상의 고문)과 형벌을 가하는

환토(圜土=감옥. 중국 주나라 때 감옥 담장을 흙으로 쌓아 둥근 형태로 만든 데서 유래)를 가리킨다.

원래 대흥군의 상중리 296번지 일대 옥담거리에 있었으나

성지 조성 때 관아의 남쪽 길 건너 상중리 367번지에 재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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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대흥옥과 형틀>

 

 

참수 터는 ‘의좋은 형제 공원’ 입구 연못가나

동쪽 큰길 건너 (대흥면 예당로 883) 예당호수 물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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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수 터 – 의좋은 형제 공원 입구>

 

 

이성만 형제 효제비(李成萬 兄弟 孝悌碑)와 ‘의좋은 형제’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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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만 형제 효제비>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가방교, 佳芳橋)' 근처에서

비석 한 기가 발견되었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전설처럼 구전되어 왔던

‘의좋은 형제’의 효제비(孝悌碑)였다.

판독된 비문은 이두(吏讀), 속자(俗字), 고자(古字), 첩자기호(疊字記號) 등을 포함하여

글자 수가 171자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3일, 지신사 하 연(河 演)이 왕지(王旨)를 받들어

'의리 있는 남자와 절개 있는 여자, 효자와 효손을 찾아 보고하라‘고

각도에 공문서를 보냈다.

<지신사(知申事) : 고려 -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

   조선 전기 - 대언사(代言司)의 으뜸인 정삼품 벼슬 = 도승지.>

충청도 대흥 호장 이성만, 이 순 형제는 부모가 살아 계실 적에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봄가을로 부모의 친구와 친척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해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호장(戶長) : 향리의 으뜸. 면장과 비슷한 직위.>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형은 어머님의 무덤을 지키고

동생은 아버님의 무덤을 지키면서,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이르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에 나아가 함께 밥을 먹었고,

맛난 것을 얻으면 모이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고 임금께 상신(狀申)했다.

임금은 형제를 궐내로 불러 정표문려(旌表門閭)하시고,

<정표문려 : 선행을 표창하고 그 마을 어귀에 문을 세워 줌.>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심하고 삼가고 지켜서, 가풍을 떨어뜨리지 말고

더욱더 힘쓰라 하시고, 영세토록 전하는 교훈이 되게 하셨다.

1497년(연산군 3년) 2월  일 세우고 표하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의좋은 형제 공원 (6)-01.jpg      의좋은 형제 공원-01 (1)-01.jpg

             < ‘의좋은 형제’ 공원 정문>                                < ‘의좋은 형제’ >

 

형제의 이야기는 1956~2000년,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벼 베기를 끝낸 가을밤, 형제가 서로의 살림을 걱정해

서로 자신의 볏단을 몰래 가져다주다가,

어느 날 도중에서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우애담이다.

 

효제비는 수몰의 위험을 피해 관아 앞에 세워졌고

관아 남쪽 길 건너에 ’의좋은 형제 공원‘이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