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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폐제분주(廢祭焚主)의 발화지 진산성지상당

 

진산성지성당-01.jpg

                                                                <진산성지성당>

 

진산(珍山)성지성당은 폐제분주 사건을 일으켜 참수로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을 기리고, 이어진 신해박해(辛亥迫害) 등

박해 때마다 희생된 교우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들의 신앙 요람에 세워진 성당이다.

 

 

조상 제사 금지령

 

1790년 북경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의 제사 금지령이

윤유일 바오로(尹有一)에 의해 조선 천주교에 전해졌다.

이에 전라도 진산에 살던 천주교인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은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廢祭) 그 신주(神主)들을 불태워 버렸다(焚主).

또한,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위패는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조상 숭배를 신앙과 같이 지켜 오던 전통 유교 사회에서

이 사건은 조야(朝野)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큰 파문을 일으켰다.

평소 학자들을 아끼고 천주교도에 호의적이던 임금 정조(正祖)는

사건의 확대를 원치 않았으나, 신하와 유림의 빗발치는 상소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천주교 금교령(禁敎令)과 함께

전국의 모든 서학서(西學書)를 불태우라 명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신해박해이다.

 

이로써 천주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앙의 토착화를 막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지식층의 입교를 어렵게 함으로써

천주교가 점차 서민층으로 확산하여 서민층이 주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2백 년에 걸친 조상 제사 논쟁

 

조상 제사 문제는 가톨릭교회가 유교문화권의 동양인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됨 없이 전하는 한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교 문화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 하는

즉, 복음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각 민족의 고유문화를 존중 수용하여

기독교를 토착화해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16세기 말 중국 선교에 나선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예수회원들은

선조와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를, 자녀나 제자가 부모와 스승에 대한

효도와 존경의 표현으로 해석, 이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미신적 행위라고 반대하였다.

논쟁이 일어나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제사 등을 금하는 훈령을 내렸고

1656년에는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이 제사를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다.

1715년 교황 글레멘스 11세는 다시 제사 등의 금지령을 내렸다.

 

2백 년에 걸친 논쟁은 교황 비오 11세가 1936년에

금지되었던 혼인, 장례, 그 밖의 사회 풍습 등에 대해서

폭넓은 허용 조처를 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가톨릭대사전 등>

 

윤지충 바오로-01-01.jpg                  윤지충 바오로-001.jpg

                  <윤지충 복자>                                   

 

복자 윤지충(尹持忠) 바오로(1759년-영조 35 ~ 1791년-정조 15)

 

전라북도 진산(지금은 충청남도 금산군) 출신으로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며, 정약용(丁若鏞)의 외사촌 형이다.

1783년 5월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84년 서울에서 김범우(金範禹)로부터 처음 천주교 서적을 빌려보았고

3년 후 외사촌 형 정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어머니 권씨의 상을 당하자,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다.

 

이러한 사실은 친척과 유림에게 알려져 불효자로 지탄을 받았고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피신해 있다가,

숙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791년 11월 21일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군수는 윤 복자를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자 외사촌 형 권상연과 함께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둘은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굽히지 않고

12월 8일(음 11월 13일) 불효 불충 악덕 죄로 참수되고

5일간 현수(懸首) 되었으니 이를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 한다.

윤 바오로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에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福者)로 추대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권상연 야고보-01-01.jpg         정약용 윤지충 권상연 가계도-01.jpg

               <권상연 야고보>                                            <윤지충 권상연 정약용 가계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복자(1751~1791)

(‘가톨릭 복자 124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1751년생으로,

‘가톨릭대사전’에는 1750년생으로 돼 있다.)

 

유학을 공부하던 권상연은 고종사촌 동생인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윤지충이, 어머니이며 권상연의 고모 제사를 안 지내는 것을 본 권 야고보는

자신도 교리를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음으로써 친지와 친척들의 비난을 받았고

급기야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역도로 몰려 체포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윤지충과 함께 진산 군수에게 자진 출두하여 수감된 그는

천주 교리를 설명하며 자기의 처사가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전라 감영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이 내려지자 두 복자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참수되었다고 한다.

권 야고보도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로 시복되었다.

 

윤지헌-01-01.jpg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기념비-01.jpg

            <윤지헌 프란치스코>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기념비>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 프란치스코 복자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1764~1801)은 1789년

장남인 형 윤지충(尹持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형이 순교하자 곧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산으로 피해 살았다.

1795년 이존창(李存昌)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은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항검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감옥에 갇혔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부인은 흑산도로, 아들은 해남으로, 딸은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어 온 가족이 이산(離散)되었다.

2014년 8월 16일 형 윤지충과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 이후 그들이 나고 자란 진산군은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에 해당하여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로 5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

 

1927년 천주교 진산 성지 성당-01.jpg

                                                    <1927년의 진산 성당>

 

성지 성당의 건립

 

삼엄한 박해 시대에 진산에는 500~600명에 이르는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대단히 많은 순교자와 신앙 고백자들이 살았던 진산이

박해가 끝난 뒤에는 백여 명 밖에 신자가 남지 않았다.

 

1887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어 천주교인들이 다시 모일 수 있게 되자

두 복자가 살던 지방리(芝芳里) 공소 회장의 집을 공소로 이용하여

집회를 하다가 1927년 새 교회를 짓게 되었다.

공소 건물을 1991년 새로이 신축하였고

2009년 공소는 성지성당으로 승격되었다.

<대전교구 홈페이지>

진산 역사 문화관-01.jpg    지초-0001.jpg

                 <진산 역사 문화관, 성당과 이웃해 있다>                                            <지초>

 

지방리의 지명은 지초(芝草)가 많이 자라는 데서 유래한다.

지초는 ‘지란지교(芝蘭之交)’에 나오는 풀 이름.

‘명심보감(明心寶鑑)’ 교우(交友) 편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착한 사람과 함께 살면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처럼

 더불어 그 향기가 동화된다…” 라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윤 바오로 형제와 권 야고보 복자의 향기를 떠올리며 성지를 돌아본다.

 

 

성지의 위치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지방리 335-2).

1914년 금산군(錦山郡)과 진산군(珍山郡)이 금산군으로 통합되고

1963년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