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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하느님의 부르심 받은 천호(天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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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 묘역 오르는 계단>                                                           <순례자 광장>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完州郡 飛鳳面 內月里  천호동 905-1)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호(天呼) 성지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180여 년 동안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교우촌은 1839년경 기해박해를 전후해 주로 충청도 지역 신자들이

이곳 산골짜기로 숨어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병인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12월 13일(음력)

전북 숲정이에서 순교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이명서 베드로, 성 한재권 요셉과, 같은 해 8월 28일(음력)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1806~1866),

그리고, 1868년 숲정이에서 처형된 열 명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여기 천호성지에 모셔져 있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교우들이

이곳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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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호 성인>                                                                 <손선지 성인>

 

정문호 바르톨로메오(鄭 --. 일명 계식 1801~1866, ) 성인

<본 연재 ‘42. 손선지, 정문호 성인이 태어난 지석리 성지’ - 2020.04.24.에 상술 됨.>

 

성 손선지 베드로(孫善智 1820~1866)

<본 연재 ‘42. 손선지, 정문호 성인이 태어난 지석리 성지’ - 2020.04.24.에 상술 됨.>

 

 

고문당하는 이명서 베드로-101.jpg          장작 팔러 가는 한재권 요셉 성인.jpg

          <고문당하는 이명서 베드로 성인>                                      <장작 팔러 가는 한재권 요셉>

 

이명서 베드로(일명 재덕 1821~1866) 성인

이명서는 충청도의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1866년에는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살고 있었다.

온순한 성품과 착한 마음씨를 지녔으며, 예의범절이 깍듯하고

어진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가슴앓이로 고생했다고 한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가슴앓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감사는 죄수의 손발과 머리를 묶고

등허리를 난타하며 배교를 종용했으나

그는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를 것이오.”라며

배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오늘 치명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기뻐하며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가톨릭 성인목록>

 

성 한재권 요셉 (다른 이름 ‘원서’. 1836∼1866)

한재권 요셉(또는 베드로)은 충청도 진잠(鎭岑. 대전 유성구)에서

독실한 신자인 한언적 도미니코와 모친 성주 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온순한 성격과 굳은 신앙을 지녔던 그는 서 막달레나와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부친은 전라도 고산 다리실로 피신했고,

그 후 그는 가족을 이끌고 대성동(전주시 완산구) 신리 마을로 가서 살았다.

한 요셉은 진잠에서 회장으로 활동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성실함과 착한 성품을 칭송하였다.

 

1866년 12월 3일 저녁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갇혔다.

고문보다도 가족들의 구명 운동과, 배교 강요로 심한 번민을 했으나,

끝내는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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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천주교인 순교비>                                   <순교비>            <김 아오스딩, 손선지, 순교 7인 묘비>

 

 

숲정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오사현

 

숲정이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준 사람은

오사현이라는 향리(鄕吏)로서 교우가 아니었다.

그는 이명서 베드로가 살던 성지동, 한재권 요셉이 살던 대성리와 가까운

유상리(전주시 덕진구)에 살고 있었다.

성지동과 대성동 신리골은 1840년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들은 담배 농사로 겨우 생계를 잇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훌륭한 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보며

오사현은 이들의 종교가 참 인간됨을 가르치는

진리의 종교라고 알게 되었고,

성지동의 조화서 성인 등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지냈다.

(훗날 진안 서촌으로 이사, 입교하여 성실한 신자의 삶을 살았다.)

 

1866년 12월 13일 신자들이 숲정이에서 참수당하자 오사현과 아들 순보는

여섯 순교자의 잘린 머리를 각자의 몸에 맞추어 놓고 거적으로 덮었다.

순교자 가족들은 돈을 걷어 오사현에게 주면서 순교자들의 장사를 부탁했다.

오사현은 나흘 만에 시신을 거두어 장대(將臺. 군 지휘소) 건너

범바위(현재 鎭北寺가 있는 곳) 아래 도랑 가에 가매장하고,

각자의 무덤 앞에 형장으로 끌려 올 때 달고 나왔던 명패를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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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실 순교자 기념관>

 

손 성인의 맏아들이 다리실로 천묘(遷墓)

 

성 손선지의 맏아들 손순화는 아버지가 처형되자 다리실로 피신해 왔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도랑 가에 가매장된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자기 집에서 건너다보이는 산(현재의 천호성지)에 모시면

항상 지켜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묘 자리로서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제 한정률 요한(다른 이름 경영. 처이자 손 성인의 딸인 손 막달레나와 함께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함)과, 정문호 한재권 성인의 가족, 그리고 신도들을 모아

1867년 정월 그믐날(양력 1867. 3. 5.) 가매장터로 갔다.

 

그곳은 연무장의 지휘소에서 가까워, 군인들에게 들킬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었다.

이때 이상한 붉은 빛이 무덤을 비추어 주어,

각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명패를 분간할 수 있어서 염습이 가능했다.

일행이 시체를 메고 달려서 위험 지경을 벗어나자 다시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일행은 이런 일을 보고 천주의 영적(靈跡)이라 감탄했다.

 

손선지 성인은 다리실(현재의 위치)에 장사하고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은 시목동에 장사하였다.

훗날 가족들은 두 분 성인도 손 성인 곁으로 옮겨 모셨다.

<천호성지>

 

성 이명서는 오사현의 주선으로 1867년 2월 18일(양력 3. 23.)

조화서, 정원지와 함께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이장되었다.

그 후 손자 이준명(아나돌)이 진안군 진안면 어은동 모시골에

산을 마련하여 1920년 3월 22일 그곳으로 옮겼다가,

1968년 시복되던 해에 서울 절두산 순교자기념관에 안치되었고,

1984년 다시 유해 일부를 전주교구로 모셔와 보관하는 여러 여정 끝에

1988년 10월 1일 천호성지에 영주하게 되었다.

<가톨릭 성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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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 묘역>

 

성지 개발을 위한 토지 마련

 

천호성지가 있는 땅과 그 주변의 산은 고흥 유씨가 하사받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곳에 사는 신자들은 언제든지 쫓겨날 처지였고,

순교자들의 무덤도 이장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1909년 뜻하지 않게 되재 본당(현 고산 본당)의

베르몽(우리 이름 목세영) 신부와 12명의 신자가

45만 평 정도를 매입할 수 있게 되어,

신자들의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순교자들의 묘소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들 신자 중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의 이름이 전해진다.

 

그 후 1941년 순교자들의 묘와, 미확인 매장자들의 묘소 조성을 위해

23만 평을 교회에 봉헌하여, 비로소 성지로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 성지 목록>

 

 

전주교구는 순교 복자들에 대한 시성식(1984년 5월 6일)이 끝난

1984년 10월부터 성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새롭게 단장한 순교 성인 묘역을 축성하였다.

 

부활성당-101.jpg   봉안경당-성인유해실-101.jpg

                                                      <부활성당>                                          <부활성당 내 봉안 경당의 성인 유해실>

 

2006년 5월 20일에는 협소한 피정의 집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1년 후인 2007년 5월 19일

천호 부활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했다.

 

 

천호 공소(다리실 · 용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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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성당>

 

천호 공소가 있는 오랜 교우촌은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는 지명이 있었다.

다리실은 월곡(月谷)이라고도 썼으며, 용추네는 용이 등천한 내(川)라고 해서

용천내라고 했는데, 용추네는 용천내가 변한 이름이다.

<천호성지 홈페이지>

 

 

2008년 5월 17일에는 경당과 사제관 두 채로 이루어진 새 건물을

전통 한옥 구조로 지어 축복식을 가졌다.

천호 공소는 박해가 끝난 1913년 기와로 된 공소 강당과

사제 숙소를 마련한데 이어 1953년 건물을 다시 지었고,

2005년 공소 건물을 철거한 후 새 경당과 사제관을 지었었다.

전주교구는 2011년 1월 고산 본당 관할 천호 공소를 준 분당으로 승격,

호남 첫 본당 사목지로서의 위상을 다시 세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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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 입구의 예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