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299 추천 수 0 댓글 0

 

65. 우리나라 두 번째로 세워진 되재성당

 

되재성당-001-01.jpg

                                                  <되재성당 - 중앙의 목재로 올린 건축물은 종탑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完州郡 高山面)의 ‘고산’은 고어로 ‘나라다라’인데,

‘나라’는 높다, ‘다라’는 산이어서, 높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고산읍지』에 고산 지세를 ‘형승위봉절령벽립만인(形勝危峰絶嶺壁立萬仞)’,

즉, ‘지형상 봉우리가 위험할 정도로 깎아 질렀으며,

고개와 절벽은 만 길이나 된다.’라는 뜻으로, 험준한 산악 지역이라는 말이다.

백제 근초고왕 때부터 고산현, 고산군으로 불렸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되재 성당-002-01.jpg

                                                                               <뒷산에서 본 되재성당>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와 경기도 일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 높고 골이 깊은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자연히 북쪽에서 피신하는 관문이 되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56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1890년에는 고산 지방의 저구리(완주군 운주면 雲洲面 신복리 新伏 또는 薪伏),

넓은 바위, 다리실(천호), 차돌박이(白石), 되재 등에

57개의 공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됐다.

천호 성지에 안장된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의 네 분 성인과

김영오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39명이 고산 지역 출신이며

110여 명 이상이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산성당 되재성당 홈페이지>

 

최초의 한옥 성당

 

되재 성당 - 1911년-01.jpg

 

 

1893년 4월 비에모(우리 이름 禹一模) 신부가

차돌박이(운주면 구제리 九梯里)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했다.

다음 해 초 거주지를 되재(화산면 승치리 華山面 升峙里)로 옮기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동학난으로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전주에서 사목하던 보두네(한국명 윤소물) 신부와 함께 서울로 피신했다.

이듬해 복귀하여 공사를 재개, 전통 한옥 양식의 성당을 완공했다.

성당 공사에는 화엄사와 쌍계사 등 사찰에서 나온 목재가 활용됐다.

<두산백과>

 

서울 약현(현 중림동) 성당(1892년 완공, 1893년 축성)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건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되재성당은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나

2007년 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주소는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로 477 - 승치리 729-1. 되재마을>

 

성전-001-2 남녀석 사이를 벽으로 갈라놓았다.jpg           성전 제단 - 001-01.jpg

      <성전-남녀석 사이를 판자 벽으로 갈라놓았다.>                                          <성전 제단>

 

건축이 이루어진 뒤, 되재성당은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는 신성학교를 세웠고

1908년 4년제 태극계명학교를 설립해 지역 주민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밤에는 야학교를 통해 민중들에게 직업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후반 수청리본당, 논산본당 등이 세워지면서

산간지역에 있는 되재성당의 역할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제10대 서병익 바오로(徐丙翼 1881~1948) 신부가

1944년 신병으로 성당을 비우게 되면서 다시 공소로 바뀌었다.

<고산성당, 되재성당 홈페이지>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중강진에서 옥사

 

비에모 초대 주임신부-01.jpg

                          <비에모 신부>

 

프랑스에서 태어난 비에모 신부(Villemot, Marie Pierre Paul 1869∼1950)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해 6월 조선에 입국했다.

한국어와 풍습을 익힌 후 1893년 되재본당을 창설, 성당을 건축하고

1898년까지 사목했으며 1898년부터 1916년까지 서울교구 당가(재정부장) 겸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신부로 서울교구의 재정문제를 담당.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약현본당 주임신부,

1926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다.

1942년부터 노령으로 일선 사목을 떠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신부로 재직하던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해 7월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사절 번(Byrne) 주교,

춘천 교구장 퀸란(Quinlan)주교 등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만포(滿浦)에서 중강진(中江鎭)까지 250리의 산길을 걷는

소위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옥사했다.

<가톨릭사전>

 

 

되재성당이 있는 ‘화산면(華山面)’은 화개산(華蓋山 356.8m)에서

따온 이름이다. <완주군 홈페이지>

‘되재’는 ‘고개가 매우 높으므로 ‘되재’라 불린다'는 설이 있으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자로 ‘승치(升峙 되 승, 고개 치)’라 쓰는 것으로 보아

'지형이 됫박을 엎어 놓은 것 같아 생긴 이름'이라는 말이<화산면 홈페이지>

옳을 것 같다.

 

 

고산에서 사목했던 두 신부

 

두 신부 묘소-01.jpg

                                                                <두 신부 묘소>

 

성당 뒷동산에는 되재성당 설립 이전에 고산 지역에서 사목했던

조스(Josse Jean 1851~1886 세자 요한) 신부와

라푸르카드(Lafourcade Arnaud 羅亨黙 1860~1888 아르날도) 신부 묘소가 있다.

 

프랑스 브와소(Boiseau)에서 태어난 조스는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를 원하여

낭트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75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880년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교육을 받고 1881년 10월 26일 조선으로 떠났다.

도중 상해에서 리델(Ridel) 주교의 지시로 일본 나가사끼(長崎)로 갔다가

주교성성식을 갖기 위해 일본에 왔던 블랑(Blanc) 주교를 수행하여

1883년 10월 1일 마침내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곧 강원도 원주 부흥골(현재는 경기도 여주)의 작은 공소를 맡아

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1884년 9월 전라도 지방 사목을 임명 받아, 벽촌을 두루 찾아다니며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고, 새로운 영세자를 얻는 데 온 정력을 다하는 동안

과로로 몸이 쇠약해진 데다가 장티푸스 증세마저 도져,

1886년 1월 28일 조선 입국 28개월 만에 선종했다.

<가톨릭 사전>

안대동공소(安大洞 전북 용안군 龍安郡 용안면)에서

판공성사를 주던 중에 사망한 것이다.

<되재성당 홈페이지>

조스 신부 묘소-001.jpg           라푸르카드 신부 묘소-01.jpg

                     <조스 신부 묘소>                                                   <라푸르카드 신부 묘소>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유르퀴(Urcuit)에서 태어난 라푸르카드는

강인한 성격에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1883년 2월 19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6년 9월 26일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1일 조선으로 떠났다.

이듬해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 전라도 지방으로 파견되어

동료인 두세(Doucet) 신부를 도우며 한국말을 배워,

가을에는 독자적으로 한 구역을 전담할 수 있었다.

34개의 공소를 돌아다니며 1,170명의 신자로부터 고해를 듣고,

52명에게 영세를 주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나,

험한 산길을 찾아 헤매는 고행과, 불편한 잠자리와 맞지 않은 음식은

그토록 건강했던 몸을 점차로 잠식하여, 1년을 채 못 버티고 병석에 눕게 되었다.

동료 신부와 젊은 베를 모렐(Ver morel) 신부가 그를 도우려고 찾아왔다가

1888년 7월 11일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가톨릭 사전>

 

성모 동산-01-1.jpg        '나에게 오라-01.jpg

                                  <성모 동산>                                                               <나에게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