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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조선 최초의 교리당 – 유항검의 초남이성지

 

천주교 최초 교리당 - 01-01.jpg

                                                          <초남이성지 - 조선 최초의 교리당>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完州郡 伊西面 南溪里)의 초남이 마을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고향이자 전라도 천주교회의 발상지다.

또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동정 부부인 유 요한과 이 루갈다가 살았고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 인물로서

호남 지방 복음 전파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믿다가 순교한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1756-1801)는

이곳 초남이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양반 가문에서

아버지 유동근(柳東根)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항검은 윤지충의 이종사촌 형이고, 권상연 야고보의 외종사촌 동생이므로

정약용, 권철신 집안과도 친인척 관계로 얽혀있다.

<이 글 ‘63. 진산성지 성당’, 윤지충 가계도 참조>

 

 

유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읽고 천주 상 등을 목격한 뒤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교리당 내의 복자 유항검-01-01.jpg              교리당 (3)-01.jpg

     <교리당에 모셔진 유항검 복자 상>                <교리당 – 교리당 터는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다.>

 

고향으로 내려와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이존창 루도비코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에게 가족과 친척을 비롯, 집에 있는 종들도 모두 전교 대상이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희사(喜捨)를 아끼지 않았다.

 

1787년 교리 연구 중, 그는 가성직제도가 독성죄(瀆聖罪)임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사람을 보내

가성직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래서 1789년 말 윤유일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이 되어 경비를 제공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윤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뒤,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항검은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했다.

1795년 주 신부가 내려와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하는 한편, 유항검과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주 신부에게 첫영성체를 했다.

 

교리당 - 04-01.jpg            십자가의 길 (2)-01.jpg

            <조선 최초 교리당 비>                                                   <십자가의 길>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이에도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邪學)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유항검은 가장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를 적용해

참수하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았다.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해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부인 신 희(申 喜),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柳文碩 1784-1801), 동생 유관검 등

그의 일가친척들이 거의 다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노복과 친지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초남이 땅이 아닌 들 건너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

바우백이(또는 바우배기)에 가매장했다.

 

99칸 생가는 사라지고-01.jpg       동정 부부가 살던 행랑채-지금은 성체조배실-01.jpg

             <“99칸 유항검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정 부부가 살던 사랑채

                 연못 일부만 남아 있었지요.”>                                                            - 지금은 성체조배실>

 

 

 

최초의 동정(童貞) 부부 -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유 아우구스티노의 장남 유중철(柳重哲 요한 1779-1801)은

친척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서 오랫동안 글을 배워 학식을 갖추었으며

“성실하고 굳은 신심, 열렬한 애덕으로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겨, 젊은 나이에도 점잖은 어른 대접을 받았다.”

<가톨릭 성인 목록>

 

유중철 요한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토로했다.

 

2년 뒤 주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Lutgarda 1782~1802)에게서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 루갈다의 부친 이윤하(李潤夏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 익의 외손으로

처남인 권철신 일신 형제, 이승훈 베드로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루갈다의 모친 권씨도 입교하여 어린 딸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복자 이경도 가롤로(李景陶 1780-1802), 복자 이경언 바오로(李景彦 1792-1827)가

루갈다의 오빠와 남동생이다.

 

1795년에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첫영성체를 하고, 15세가 되던 1797년,

이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어머니는 딸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주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주 신부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작심한 유중철 요한이 떠올라

곧장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했다.

 

복녀 이순이 루갈다-01.jpg           복자 유중철 요한-01-01.jpg

           <복녀 이순이 루갈다>                         <복자 유중철 요한>

 

마침내 1797년 가을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졌고

1798년 10월, 부모님 앞에서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살기로 다짐했다.

이후 둘은 동정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해 나갔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유 요한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9월 중순, 이 루갈다와 유중철의 동생 등 가족들과 노복들도 체포되었다.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 유중철 유문석 형제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났으나, 뒤이어 쫓아온 포졸들에게 다시 체포돼

감사 앞으로 끌려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정 부부 순교자 유 요한과 루갈다는 한국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순교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와 김천애 안드레아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순교비 - 김제 요촌성당-01.jpg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jpg

     <복자 한정흠 순교비 - 김제 요촌성당>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한정흠 스타니슬라오(韓正欽 1756∼1801) 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 출생으로

먼 친척인 유항검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으로부터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는 유항검과 함께 잡혀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전혀 굴복하지 않고

같은 감옥의 김천애 안드레아, 최여겸 마티아와 함께 꿋꿋이 버텨나갔다.

그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돼 문초를 받은 뒤 고향에서 처형하라는 명에 따라

한 스타니슬라오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 안드레아(金千愛 1760∼1801)는

유항검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중 유항검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신자가 된 그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참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신유박해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된 뒤를 이어 유중철과 함께 체포되었다.

1801년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8월 27일(음력 7월 19일) (혹은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초남이성지와 유항검 생가터 성역화

 

복원된 유항검 생가-01.jpg

                                                                  <복원된 유항검 생가>

 

유항검 일가의 재산은 적몰(籍沒), 저택은 ‘파가저택’(破家瀦宅) 되었다.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처벌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누구도 다시는 그 터에서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큰 형벌이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의 동생 관검(關儉)의 사돈 이우집(李宇集 1761~1801)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유항검의 생가터와

거기에서 약 4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교리당 터,

그리고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왔던 임시매장 터가

초남이 성지 서쪽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교구에서는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이 부지들을 매입하면서 성역화 공사를 시작했다.

2000년 9월 23일 생가터에 피정의 집과 제단, 각종 성인상을 마련했고,

2005년 5월 28일 교리당 부지에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 경당을

건립하여 봉헌했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367-1>

 

 

첫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윤지헌 유해 발견

 

교리당에 모셔진 권상연 윤지충 윤지헌 복자 유해-01.jpg     권상연 야고보 명문이 적힌 백자 사발지석-01.jpg   윤지충 백자사발지석-02.jpg   윤지헌 제기접시-01.jpg

   <교리당에 안치된 세 분 복자.   권상연 윤지충 윤지헌>       <백자 사발 - 권상연            윤지충                   윤지헌>

 

전주교구가 2021년 3월 11일 유항검 일가의 원 묘지 터인 바우배기 개발을 위해

무연고분묘를 개장하다가 순교자 추정 유해와 그 이름이 적힌 백자 사발을 발견했다.

전혀 손상되지 않은 사발에는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이름이 또렸했다.

교구는 유해를 발굴,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해부학적 조사, 유전자검사,

출토 유물에 대해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하는 등 과학적 검증을 실시해서

세 분 복자임을 확인했다.

순교한 지 230년 만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세 복자 유해는 2021년 9월 16일 초남이 성지 교리당에 안치됐다.

 
새 성전 예정지 (2)-01-01.jpg

                                                              <초남이 성지 성당 신축 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