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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첫 순교자의 처형지 풍남문, 전동성당

풍남문-01.jpg

                                                               <풍남문>

 

전주성(城)의 남쪽 문인 풍남문(豊南門)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호남의 사도 유항검 등이 처형되고 그 잘린 목이 매달렸던 거룩한 성지이다.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

 

고려 말에 최유경(崔有慶 1343∼1413)이 쌓은 전주부성(全州府城)은

1767년(영조 43) 큰 화재가 일어나 남문과 서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9월에 부임한 전라도 관찰사 홍낙인(洪樂仁 1729∼1777)이 두 문을 새로 건립하고는

풍남문과 패서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홍낙인은 전주가 “왕실이 발원한 곳이자 예로부터 풍패라고 일컬어 온 연고로

(璿潢發源之地 古有豐沛之稱故) 풍남문 패서문 이라 부른다.”고 기록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을 물리쳐 중국 천하를 장악하고

새로운 나라 한(漢)을 건국한 유 방(劉 邦)의 고향이

시골의 소읍 풍패(豐沛, 지금의 강소성 패현)이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관향[貫鄕, 시조(始祖)가 난 곳]이기 때문에

유방의 고향 풍패에 빗대어 전주를 흔히 ‘풍패향(豐沛鄕),

또는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풍패에서 한자씩을 빌려와 두 문 이름으로 쓴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지금 이렇게 ’사대주의적 이름’을 지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을,

조선 시대에는 사회 모든 구석에서 다 당연히 그렇게 했으니,

중국 숭배 일변도의 선배님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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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동성당>

 

전동 성당 초대 주임인 파리 외방전교회 보두네 신부는

순교자들의 처형장이던 풍남문 밖에 성당을 짓기로 했다.

그때 일제 통감부가 전주에 신작로를 닦으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이 성벽 돌과 흙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이를 가져다가

1908년 성당 주춧돌로 삼아 건축을 시작했다.

 

보두네 신부는 17년 동안 매입한 5천 평의 대지에

교우들이 낸 신축기금과 자신이 절약해 모은 돈,

그리고 안원오(프란치스코) 회장과 김찬일(아우구스티노) 회장이 기부한 돈 등

모두 5만 원이라는 거액을 투입했다.

설계는 서울 명동 대성당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가 맡았다.

 

중국인 벽돌공 100여 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헌 흙을 사용해 벽돌을 직접 굽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산에서 캔 화강석을 말 네 필이 끄는 마차로 운반해 왔고,

목재는 오늘의 치명자산을 매입해 벌목하여 사용했다.

 

공사 기간 전주 시내에 사는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수, 장성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밥을 지어 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마디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어깨에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신자들의 희생적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 지 만 7년 만인 1914년에

호남 처음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외형공사를 모두 마쳤다.

 

전동성당 성전-01.jpg                                    피에타-01.jpg

  <명동 대성당과 같이 공중 회랑과

     많은 창을 통해 자연 채광을 살린 성당 내부>                                        <피에타>

 

보두네 신부는 성당 완공을 못 보고 1915년 5월 이질에 걸려 57세로 선종했다.

내부 공사는 제2대 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가 맡아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진행하여 1931년 6월 18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전봉헌식을 거행했다.

전동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 화려한 건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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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 중인 전동성당 – 2022년 5월 >                                             <사제관>

 

1915년 종탑에 설치된 종은 프랑스인 마리아 앙리에트가 봉헌했다.

1942년 일제가 이 종을 공출하려 하자 당시 보좌였던 오기선 신부가

“만일 적이 공습했을 때 전기나 통신이 끊어지게 되면 성당 종을 쳐서

알릴 수 있고, 또 매일 울리던 종이 울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

이라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나바위와 수류 성당을 비롯해 전주 시내 교회의 종은 모두 공출당했으나

오 신부의 임기응변으로 전동 성당 종만 공출을 면할 수 있었다.

<전주교구 홈페이지. Good news 성지목록>

 

 

초대 주임신부 보두네(우리 이름 윤사물 尹沙勿)

전동성당에 모셔진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01.jpg       십자가를 든 윤지충과 목에 칼을 쓴 권상연-01.jpg

                <성당 뜰에 모셔진 보두네 신부 흉상>             <십자가를 든 윤지충과 목에 칼을 쓴 권상연 >

 

보두네(Baudounet, Francois Xavier 1859-1915)는 프랑스 아베롱 지방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1859년에 출생했다.

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4년 9월 20일 사제서품을 받고

동료 신부 두 사람과 함께 조선으로 발령받아 그해 11월 19일 조선으로 떠났다.

도중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도착, 조선 입국을 기다리다가

1885년 8월에야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보두네신부는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힌 다음

6개월 뒤에 경상도 신나무골로 갔고, 전교 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우리말 공부에 몰두하여, 이듬해에 전라도 지방을 맡게 되었을 때는

모국어만큼이나 한국말을 잘 구사할 수 있었다.

 

1889년 전주 본당에 부임하지만, 당시 전주가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라도 감영이 전주에 있었기 때문에 전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근교인 대성리에서 머물다가 1891년 봄에야

현재 전동성당 자리(전주 완산구 전동 200-1)에서 전교를 시작했다.

 

당시 전주에는 신자 집이 하나밖에 없었으나

1894년 동학혁명 동안에는 신부 몇 사람이 나누어 맡아야 할 만큼

신자 수가 급격히 불어났었다.

교세가 늘어나 더 큰 성당을 지어야만 했으므로 그는 모든 경비를 절약했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도 팔아 성당 건립을 위해 충당했다.

결국,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물의 뼈대를 이룬 다음

완공을 후임에게 맡기고 1915년 5월 27일 선종했다.

<가톨릭사전>

 

전동(殿洞)의 지명(地名)은 경기전(慶基殿)에서 유래

 

경기전-01.jpg

                                                              <경기전>

 

조선 3대 왕 태종은 1410년(태종 10), 완산·계림·평양 등 세 곳에

어용전(御容殿)을 지어 부왕(父王)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다.

 

1442년(세종 24)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숭전(永崇殿)이라 불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영숭전, ‘네이버 지식백과 – 전주 경기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영종전,

   ’문화유산채널‘에는 영흥전으로 나와있다.>

 

전동성당 바로 이웃 ‘한옥마을’에 경기전이 있으므로

1946년 동 이름을 전동으로 정한 것이다.

 

윤지충 권상연, 유항검 일가 이외의 순교자들


김유산 토마스 - 탁희성 화백 그림-01.jpg        순교자이우집-01-이우집이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등과 함께 서양선박을 요청하는 모의를 하고 있다-002.jpg

                    <승려 시절의 김유산>                                <이우집이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등과 함께

                                                                                  서양선박을 요청하는 모의를 하고 있다>

 

김유산 토마스(金有山 1760~1801)는 충남 보령에서 천민으로 출생,

한때 승려 생활을 하였으나 환속, 홍산(부여군 홍산면)에서

신발을 팔며 살다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그 후로는 역졸(驛卒)이 되어 유력 교우들 사이에 소식을 전해 주었고

1798년과 1799년 두 번에 걸쳐 중국 북경을 왕래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전주에서 유항검, 윤지헌 등과 함께 체포되어

10월 18일 의금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4일 전주에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과 함께 참수당하여 순교했다.

<가톨릭 사전>

 

 

전라도 영광(靈光) 출신인 이우집(李宇集 1761~1801)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이복동생 유관검과 사돈 간이다.

유관검이 매형의 사촌 동생이어서 가깝게 지냈다.

1795년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전주 누님 집에 묵었는데

이때 유관검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양선박청래사건’(西洋船舶請來事件)에 관련되어

3월에 체포되었다. 이우집은 신문 중에 '서양에서 큰 배가 올 텐데

그때 우리나라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무력으로 결판을 낼 것이다'하는 말을

유관검이 했다고 진술했다.

이 때문에 국사범으로 몰려 서울로 압송됐고 의금부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전주로 이송돼 1801년 10월 24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됐다.

<한국가톨릭대사전>

 

흔적이 없어진 전주 감영 터

전주 좌옥 터 - 한국문화전통전당 후문 주변으로 추정-01-01.jpg                 전주 우옥 터에 세워진 전북 경찰청-01.jpg

 <전주 좌옥 터 - 한국문화전통전당 후문 주변으로 추정>          <전주 우옥 터에 세워진 전북 경찰청>              

 

전주의 감옥은 좌·우 옥이 있어서 현재의 경찰청 자리가 우옥이고

남부종합병원 자리가 좌옥이다.

남부종합병원 일대는 옥거리로 불려 오다가 오늘날은 오거리로 불린다.

전라도의 수부였던 전주는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로 감옥이 가득 찼고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수많은 신자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 속에 치명했다.

 

감옥에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

 

복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01.jpg       복자 이경언 바오로_탁희성 작.jpg

       <복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827?-1839년>            <입교를 권면하는 이경언 바오로>

 

 

이성삼 바오로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아 어린 나이에도 본분을 지키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한, 귀여운 작은 천사였다.

열 살 무렵 교리 문답과 아침저녁 기도를 배운 다음,

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선교사는 그녀의 신심에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지만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 왔으니,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이봉금을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5일(음력 10월 30일)에서 6일 밤(음력 11월 1일)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던 것 같다.

한국 교회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최연소 순교자가 된 것이다.

<성인목록>

 

복자 이경언 바오로 (李景彦 1792-1827년)

유중철 요한의 동정 부인 이순이 루갈다의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했다.

몸은 허약했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했다.

신유박해 이듬해인 1802년에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

그의 집안은 몹시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바오로는 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살면서 가난을 신앙으로 이겨 냈다.

22세 되던 해에 한 중인 집안의 딸과 혼인했는데,

아내의 성질이 고약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인내로 이를 극복했다.

그는 언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복음 전파에 열중했다.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북경을 오가는 밀사들에게 경비를 마련해 주느라 힘썼으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전주에서는 포졸들을 한양에 보내 그를 체포하여

포도청에서 문초하였고, 이후 전주로 이송하였다.

그는 전주 옥중에서 어머니와 가족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그리고 명도회 회원들에게

세 통의 서한을 작성해 보냈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 없이 어찌 한시인들 이를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힘든 옥살이를 서술하곤 했으나, 선천적으로 약했던 육체는

더 이상 고통을 이겨 내지 못했다.

상처는 계속 깊어졌으며, 그는 신음 속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다가

1827년 6월 27일(음력 윤오월 4일) 하느님께 맑은 영혼을 바쳤다.

<성인목록>

 

복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金召史 1789∼1839년)

김조이 아나스타시아-01.jpg          심조이 바르바라-02-01.jpg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심조이 바르바라>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한 뒤, 남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자녀들은 물론 마을 부인들의 교리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에, 김조이 부부는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를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때 그들 부부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딸, 이 아나스타시아는 첫영성체를 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조이는 딸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하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에서 김 아나스타시아는 여러 차례 신문과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주를 배반하고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라.’는 강요를 줄곧 거절하였으며,

이 때문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김 아나스타시아는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했고,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의 상처로 1839년 10월경 사망하고 말았다.

<전주교구 전주 감옥 터 성지 홈페이지>

 

 

복녀 심조이 바르바라 (沈召史 1813∼1839년)

 

심조이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 홍봉주 토마스와 혼인했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 루카는 그녀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함께 체포되어 1840년에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녀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홍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심 바르바라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교우가 박해를 피해 자기 집으로 피신해 오자,

심 바르바라는 그들을 헌신적으로 거두어 주었다.

그녀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짐이 된다는 눈치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심 바르바라는 시아버지와,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체포될 때나 문초를 받을 때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했으며, 건강이 나쁘고 체질이 약하였음에도, 전혀 겁내지 않았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심조이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그녀가 처형 때까지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형벌의 고통과 더불어 이질까지 걸려,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 숨을 거두었다.

 

■ 조이(召史)

양민의 아내 혹은 과부를 일컫는 말로 흔히 성(姓) 밑에 붙여 부름.

<한국고전용어사전>

한자로는 ‘소사(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어야 한다.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이렇게 부르는 분이 네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