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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전주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성지

전주 숲정이 성지-01-01.jpg

                                                                     <전주 숲정이성지>

 

 

 

전주 숲정이성지(전주시 덕진구 공북로 19, 진북동 1034-13)는

여섯 분 성인과 12분 복자가 처형된 영광의 땅이다.

 

전주 ‘숲정이’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머리’라고도 하는데,

조선 시대 군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어 군사들의 무술 연마 장으로,

중죄인들의 사형장으로도 사용됐었다.

 

1802년 1월 31일(음 1801.12.28.)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부인 신 희(申 喜),

자부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남편 유중철은 1801년 11월 14일 교수형으로 순교),

동생 유관검(柳觀儉)의 처 이육희(李六喜), 일찍 죽은 형의 아들 유중성(柳重誠) 등

유항검의 가족이 처음 참수되면서 이곳은 천주교도의 처형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12년간 옥고를 치른

충청도 출신 김대권(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과

경기도 출신 신태보(베드로) 등 5명이, 5월 29일 이곳에서 순교했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 6명이

12월 13일 처형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앞선 글에서 기술한 분들 이외의 순교자들을 소개한다.

최양업 신부의 마부로 일하던 성 조화서 베드로-01.jpg     아내를 위로하는 성 정원지 베드로-01-01.jpg    복자 유중성 마태오-01-01.jpg

<최양업 신부를 모시는 성 조화서 베드로>  <아내를 위로하는 정원지 베드로>             <복자 유중성 마태오>

                                   

성 조화서 베드로(1815∼1866)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39년 순교한 조 안드레아의 아들로

수원 지방의 도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잃은 뒤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여

한 막달레나와 혼인, 아들 윤호를 두었으며,

몇 년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일했으나,

최 신부가 선종하자 1864년 전주 소양면 성지동으로 이주했다.

그는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켰다.

1866년 12월 5일 아들과 함께 붙잡혀 전주 감영에 갇혔고,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도마지’는 현재 평택시 청북읍(靑北邑) 고잔3리(高棧3里) 원고잔(元高殘)이다.

조선 시대 핍박을 받던 고령 신씨가 도망쳐 피신한 ‘도망지’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의 사당 고잔묘가 있다.

<성인 목록>

 

 

성 정원지 베드로(1846∼1866)

정원지는 진잠(鎭岑-대전광역시 유성구 지역의 옛 지명)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공주에서 순교하자 어머니, 형과 함께 고향을 떠나 전주 지방을 전전하다가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결혼하여 농부로 살고 있었다.

그는 지극히 착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조화서는 이 젊은이를 성의껏 지도해 주었다.

1866년 12월 5일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갇혔다.

12월 13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전주 숲정이성지 홈페이지>

 

 

복자 유중성 마태오 (柳重誠 1784 ? ∼1802년)

유중성 마태오는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5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전주 숲정이성지 홈페이지에는 36살, 성인목록에는 35살.>

작은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9월 중순, 어머니와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석방되었고

유 마태오와 친척들은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났으나

도중에 사람들 앞에서 “관장이 법대로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침으로서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1802년 1월 31일(양력)

숲정이애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니, 그의 나이 18세가량, 미혼이었다.

<전주 숲정이성지 홈페이지. 성인목록>

 

 

복자 신태보 베드로 (1768∼1839년)

<연재 48. 풍수원 성당 편 2020. 10. 25. 에 소개됨>

복자 이태권 베드로-01.jpg      복자 이일언 욥-01.jpg     노예처럼 자란 복자 정태봉 바오로-01.jpg

        < 복자 이태권 베드로>                       <복자 이일언 욥>                  <노예처럼 자란 복자 정태봉 바오로>

 

 

복자 이태권 베드로 (李太權 1782∼1839년)

이태권은 충청도 홍주의 배울(현 홍성군 홍북읍 이동 梨洞)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라도 유배지에서 사망한 이무명이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그의 삼촌이다.

 

이 베드로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에는 아버지와 삼촌, 형과 함께 잡혔다가 또다시 풀려났고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됐었다.

이처럼 이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뒤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 지켜나가,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던 그는

1827년에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고

김대권 베드로, 이일언 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 갇혀 지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성 샤스탕 신부의 명에 따라 옥중 수기를 남겼다.

 

 

복자 이일언 욥 (李日彦 관명 冠名 태문 太文 1767∼1839년)

충청도 홍주의 대벌마을에서 태어난 이일언 욥은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는데

미움을 받아 예외적으로 1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다.

언제부터인가는 관장의 허락 아래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고

1815년부터는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살았다.

1826년 5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任實)의 대판(大阪)으로 이주하여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엄혹한 문초와 형벌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으나

이 욥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관장은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그를 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후, 이일언 욥은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지낸 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전주 숲정이로 끌려나가 참수되었다.

처형장으로 가는 동안, 자식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난다.

 왜들 우느냐?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행운을 기뻐하고,

 너희들도 훌륭한 교우가 되거라.”

<성인 목록 등>

 

 

복자 정태봉 바오로 (鄭太奉 1796∼1839년)

1796년 충청도 덕산 출생의 정태봉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당숙의 손에 자라났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龍潭. 전북 진안군)으로 이주했다.

그때 정 바오로는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용담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일언 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아내를 구출하는 김대권 복자-01.jpg               복자 오종례 야고보-01.jpg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아내를 구하는 김대권 베드로>                      <복자 오종례 야고보>

 

 

복자 김대권 베드로 (金大權. ? ∼1839년)

김대권은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가 그의 아우이다.

 

한때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 무렵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천주님의 부르심으로,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아내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했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 후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던 중

1827년 정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잡혀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곧 전주로 이송되어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지내고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기해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 오종례 야고보 (吳宗禮 1821-1840년)

충청도 은진의 양반 집안 출신인 오종례는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했다.

장성한 뒤로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다.

결혼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사는 형을 찾아갔다가

형과 다른 교우 여럿과 함께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는 배교 유혹에도 꿋꿋하게 견디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전부터 원하던 일이었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 11. 30.)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복녀 이조이 막달레나-01.jpg       복녀 최조이 바르바라-01.jpg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01.jpg

        <복녀 이조이 막달레나>                   <복녀 최조이 바르바라>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복녀 이조이 막달레나 (李召史 1808∼1840년)

이조이 막달레나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성한 뒤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 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했으나

19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성인 목록>

남편이 사망한 뒤부터 이 막달레나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大齋. 금식재)와

소재(小齋. 금육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무식한 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기꺼이 맡았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조이 막달레나는

전라도 광주 홍재영의 집에서 공동 생활하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문초를 받는 동안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했고,

갖가지 형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복녀 최조이 바르바라 (崔召史 1790∼1840년)

최조이는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으나

천주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장성한 뒤 신태보 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는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바르바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면서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홍재영의 집에서 이조이 등과 함께 체포되어

1840년 1월 4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洪梓榮 1780∼1840년)

홍재영은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는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고, 장성한 뒤에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된 뒤에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 되어,

이전의 잘못을 속죄하려는 생각에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기도와 묵상 생활에 열중하고, 일주일에 금식재를 세 차례나 지켰다.

1832년 유배자 사면령이 내렸으나, 귀향하지 않고 광주에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해 다니는 교우들에게 자신의 집을 내주고,

그들을 한 가족처럼 대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전주 포졸들이 찾아와, 함께 있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전주로 이송했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재영은 근본이 흉악한 종자로서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선교사를 청해 올 때 힘을 기울였고, 천주교 서적을 베낀 것이 110여 권에 이르며,

  수십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숨겨 주었다.

  이처럼 죄악이 으뜸이 되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홍재영 프로타시오와 동료들은 1840년 1월 4일 참수되었다.

 

 

전주 숲정이의 성역화

천주교인 순교지 숲정이-01.jpg           윤호관-01.jpg

                  <천주교인 순교지 – 숲정이>                                                           <윤호관>

 

 

1930년대 초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이 숲정이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

전주 숲정이 처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됐다.

1935년 전동 본당의 이학수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 순교비를 세웠고,

1968년 순교복자 현양 탑이 건립되었다.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된 숲정이 순교 터는,

도시화의 물결로, 1960년 전주교구에 의해 설립된 해성 중고등학교가

1992년 삼천동 신축 교사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에

새로 성지를 조성하고, 본래의 터에서 옮겨 온 토사를 그 위에 덮고

십자가와 순교자 현양 탑을 세워 순교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해성 중고교 체육관은 ‘윤호관’으로 변신하여

1997년 설립된 전주 가톨릭신학원이 자리 잡았다.

2004년 6월에는 성모자상과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었다.

서천교-01.jpg      성 조윤호 요셉의 처형 - 서천교 벽화-01.jpg

                                                <서천교>                                        <성 조윤호 요셉의 처형 – 서천교 벽화>

 

 

성 조윤호 요셉(趙- - 1848~1866년)이 치명한 서천교(西川橋)성지

서천교는 조화서 베드로 성인의 아들 조윤호 요셉 성인이

1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곳이다.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조윤호는 어려서부터

돈독한 신앙생활을 익혀, 깊은 신심과 성실한 수계생활로

주위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며, 동시에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과격하고 용감한 모습도 보여 주었다.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 교우 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이 루치아와 결혼,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 5일 부친, 정원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등과 함께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성지목록에는 12월 4일>

전주 감영에서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부자간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2월 13일 조화서 등은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조윤호는 12월 23일 서천교 밑에서 교살로 순교했다.

 

조선 시대에는 처형에 있어서 몇 가지 관례가 있었다.

참수하는 죄인에게는 하루 전에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고,

참수 후 사흘간은 누구도 그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으며,

부자를 같은 날 처형하지 않는 것 등이어서

성 조윤호 요셉의 사형도 부친 처형 열흘 후에 집행하게 되었다.

 

조 요셉은 손을 묶이고 곤장을 맞기 시작했다.

곤장은 수없이 부러져 나갔고 얼마를 쳤는지, 마침내 고개가 푹 숙어졌다.

그러나 요셉은 죽지 않았고, 포졸은 장터로 모여든 거지 떼를 시켜

밧줄로 목을 매고 양쪽에서 당기니 숨을 거두었다.

조윤호의 장한 죽음으로 그의 집은 연 3대의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초록바위-01.jpg       초록바위 벽화 -뒷면-01.jpg

                                           <초록바위>                                                 <순교 기념 모자이크 - 뒷면>

 

 

남종삼(南鍾三) 아들과 홍봉주(洪鳳周) 아들이 수장된 초록바위

 

초록바위(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산 1-9)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1817~1866년)의 14세 된 아들 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1814~1866년)의 아들이 수장된 곳이다.

 

이 두 가정은, 프랑스와 교섭하여 조선을 침범하는 러시아를 막고

그 대가로 천주교를 공인받으려다가 실패, 온 가족이 처형되거나

노비로 전락하고 가산을 몰수당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전주 감옥에 가뒀다가

나이를 채워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으로 죽인 다음 전주천에 수장시켰다.

 

남종삼이 처형된 후 그의 부친 남상교와 명희는 공주 감영에 갇혔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명희는 전주 감영으로 옮겨졌고,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까지 기다렸다가

1867년 가을 처형한 것이다.

 

홍봉주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낙민 루카(洪樂民)의 손자이며,

복자 홍재영의 아들로, 홍재영이 유배된 광주에서 태어났다.

모친 정조이(丁召史)는 복자 정약종의 맏형 약현(若鉉)의 딸로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