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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메트르 신부의 손골 성지

 

186637일 김도리 신부가 새남터에서 참수된 23일 뒤,

피에르 오메트르 신부가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군문효수 되었다.

조선교구 5대 교구장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와 위앵(Huin ) 신부,

조선 교인 장주기 요셉과 황석두 루카가 함께 순교했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음을 기다리던 다섯 성인은

고종황제의 혼례를 앞두고 장안에 피가 흐르면 국가의 장례에 이롭지 못하니,

한양에서 250 리 밖 멀리 떨어진 곳을 형장으로 택하라"는 무당의 예언에 따라

갈매못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갈매못 성지-02.jpg

<갈매못 성지>

 

오메트르 신부는 우리나라에 온지 31개월,

15개월 머물던 손골을 떠난 지 17개월만에

충청도 수영(水營)의 쓸쓸한 바닷가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피에르 오메트르(Pierre Aumaître, 또는 메트르 베드로)

183748일 프랑스 앙굴렘(Angouleme) 교구내 애제크(Aizecq) 라는 작은 마을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농이자 제화공이었다.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기를 원했던 오메트르는

매일 아침 4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사는 교사를 찾아가 라틴어를 배웠다.

1852년 그의 본당 신부는 주교에게 그를 리슈몽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토록 추천하였다.

    

오메트르 신부-01.JPG

<오메트르 성인>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이 되었고, 1857년 앙굴렘의 대신학교에 진학했다.

수업 첫 해에 선교사가 되겠다고 희망한 오메트르는

1859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약 3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1862614일에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조선 파견을 명받았다.

 

같은 해 818일 조선으로 떠났으나 입국에 어려움을 겪다가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선 학생 두 명과 함께

중국을 거쳐 어선을 타고 연평도에 도착,

1년 가까이나 지난 1863623일에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오 신부는 제4대 조선 대목구장 시메온 베르뇌 주교(Simeon Francois Berneux, 1814-1866.

우리 이름 張敬一)와 서울에서 1개월 동안 지낸 뒤 7, 손골로 들어갔다.

선교를 위해 조선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손골의 오메트르신부-02.JPG


<손골의 오메트르 신부>

 

 

이듬해 111일 오 신부는 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손골에 가까운 네 곳에서 사목하라는 지시를 받고 손골을 떠나

묘루니(손골 부근), 신봉리(용인시 수지읍), 미리내(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美山里),

무량골(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소내실 등에서 사목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고 1866223일 장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오메트르 신부는 5대 교구장 안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新里 충남 당진시)로 갔다.

교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신부들이 자수하는 게 좋겠다.’는 안 주교의 뜻에 따라

자수한 오 신부는 갈매못의 황량한 바닷가에서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신리 성지-01.jpg

<신리 성지>

 

오 신부는 196810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하여 성인이 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명동대성당에 안치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