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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발상지 천진암

  

17세기에 시작된 실학(實學)18세기 들어 학파(學派)를 이루는데,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가 양대 산맥이었다.

이 익(李瀷. 성호-星湖. 1681 숙종 71763 영조 39)을 태두로,

농업 중심의 전반적 사회개혁을 추구한 중농주의(重農主義) 성호학파는

소장 남인(南人)들인 권철신(權哲身) 이 벽(李 蘗) 등에게 계승되었고,

두 학파는 19세기,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그 사상이 종합되었다.

<두산백과>

   

천진암 강학당 터-03.jpg


                                                                <천진암 강학당 터>

 

 

1777년부터 권철신은 제자 이 벽, 정약용 등과

경기도 광주와 여주 등지 사찰에서 실학 강학(講學)을 가졌는데,

이 강학 장소 중 하나가 경기도 광주(廣州)군 퇴촌(退村)면 우산(牛山)

앵자봉(鶯子峰)에 있는 절 천진암(天眞庵) 이다.

 

천진암은 고조선(古朝鮮) 시대 단군(檀君) 영정(影幀) 천진(天眞)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당집으로 추정되며, 훗날 절이 되었다가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백과>

 

6, 7년간 이어 온 강학은 유교 경전 연구 위주였으나

한문으로 된 서학서(西學書)도 집중 검토되었다가

결국 천주신앙으로 전개되었다.

 

이 벽은 서학(西學)을 서교(西敎), 천주학을 천주교로,

,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변환시킨 주역으로서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지었고, 정약종은 십계명가(十誡命歌)를 만들었고,

천주교 전례를 몰랐던 그들은, 삼종기도(三鐘祈禱) 대신

주자(朱子)의 사물잠(四勿箴) 등을 경문(經文) 삼아 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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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천주교 창시 2백년 기념비>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천주교가 다른 나라 선교사들의 전도로 시작되었으므로,

어느 나라에도 그 나라 천주교 발상지는 없으니,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회에만 있는 자랑스럽고 거룩한 성지가 되었다.

 

1836년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는

1838년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서,

"이 벽은 천주교에 푹 빠져서, 몇몇 개종자들과 힘을 합쳐,

  1783이씨성 가진 사람을 대표자로 북경에 파견하여

  이듬해 2월 영세를 받고 돌아오게 했다."고 썼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984“‘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할

이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고,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라고 강론했고,

 

1993년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에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작성하여 친필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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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수난>

 

천진암 성지에는 한국 가톨릭의 기초를 놓은 다섯 분의 묘가 모셔져 있다.

 

이 벽(李 蘗 1754~ 1785)

자 덕조(德操), 호 광암(曠庵), 세례명 세례자 요한.

 

고조부 이경상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온 이후

그의 집안에는 서학과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이 있었으며

이 벽은 이 책들을 연구하여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임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산 백과>

 

1777(정조 1) 권철신 등 기호 지방 남인 학자들이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개최한 강학회(講學會)

자형 정약현(丁若鉉)의 동생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들과 함께 참여하여

그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전함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자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783년 이승훈의 부친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승훈을 함께 보내 세례를 받아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가르쳤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 신자가 되었다.

 

이 벽은 천주교 지도자로서 많은 집회에서 전례의식(典禮儀式)을 주도하고

신자를 늘리고 교세를 확충했으나, 가문의 결정에 따른 부친에 의해

집안의 광에 갇혀 있던 중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벽 성조 독서처 터-03.jpg


                                                                  < 이 벽 성조 독서처 터>

 

이승훈(李承薰 1756 영조 32 1801 순조 1)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세례명 베드로.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盤石洞지금의 中林洞 일대)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사는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약현 약전 약종(若鍾) 약용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서학에 접하여 모임의 중심인물인 이 벽과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40일간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5년 명례동(明禮洞 명동, 충무로일대) 김범우(金範禹) 집을

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 신앙 모임을 가짐으로써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정약종 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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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시자 5위 묘소>

 

 

권철신(權哲身 1736~ 1801)

호 녹암(鹿庵) 자 기명(旣明) 세례명 암브로시오.

 

실세한 남인 가문에 태어나 이 익, 이병휴(李秉休)의 문인이 되어

남인학파의 연장자이며 지도자로서 서학파의 대가가 되었다.

1777(정조 1)부터 천진암, 주어사에서 김원성(金源星) 정약전 정약용

이 벽 이윤하(李潤夏) 등 남인계 학자들과 서학교리연구회를 열었으며

이를 기연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학행(學行)으로 많은 동향인들을 천주교에 입교하게 하였고

여러 차례 천주교인으로 피소되었지만, 정조의 비호로 화를 면했다.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가 집권하자 체포되어 정약종 홍낙민(洪樂敏) 이승훈

홍교만(洪敎萬) 최필공(崔必恭) 최관천(崔冠泉)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형 집행에 앞서 옥중에서 장독으로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약종(丁若鍾 1760 ~ 1801.)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의 셋째 아들이다.

형 정약현과 정약전이 있고 동생이 정약용이다.

젊은 시절 도교를 연구하다가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에 입문했다.

 

1795(정조 19)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맞아들이고,

1799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냈다.

18012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형제들이 문초를 받게 되자

스스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돼, 순교하였다.

한자를 모르는 신도를 위해 우리말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일신(權日身 ? ~ 1791)

자 성오(省吾) 호 이암(移庵). 세례명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권 근(權 近)의 후손으로 권철신의 동생,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서 이 벽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전라도의 유항검(柳恒儉),

충청도의 이존창(李存昌) 등에게 전도하여 천주교를 이들 지역에 퍼지게 하였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천주교 탄압이 벌어지면서 홍낙안(洪樂安) 목만중(睦萬中)의 고발로

교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노모의 회유로 옥중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써서

예산(禮山)으로 유배지가 바뀌었으나

유배지로 가던 중 취조 과정에서 얻은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두산백과>

 

           마리아 상-04.jpg


                                                                           <마리아 상>        

 

천진암은 1백년 계획으로 1975년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완공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성당이 될 것으로 믿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