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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리 성지 - 2 천주교 3대 요람과 다섯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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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명저 택리지(擇里志)에서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곳이 내포(內浦)”라고 하였는데

오늘의 예산, 당진, 서산, 홍성 등이 이곳이다.

지세가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중요한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난리 때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포 평야의 상당 부분은 천변의 저습지 개간을 통해 조성된 간척지로서

농민 상인 천민이 많이 거주해 왔다.

이들에게 양반 상민의 구분 없이 사람은 다 평등하다는

천주교 교리가 빠르게 전파되었고,

관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점도 있어서,

이곳은 일찍이 한국 천주교 3대 요람지의 하나가 되었다.

 

자연히 교우촌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데가 홍주 거더리와 신리(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

세거리(현 합덕읍 대합덕리) 등이다.

 

논 한가운데 위치한 거더리는 삽교천에 홍수가 날 때마다

모두 물에 잠겨 거덜난다고, 거더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신리(新里)는 말 그대로 새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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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블뤼 주교>

 

당시에 제일 컸던 이 교우촌에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

(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우리 이름 안돈이 安敦伊)가 교우들을 이끌며

한국 천주교사의 기초를 쌓았다.

 

다블뤼 주교는 1818년 프랑스 아미앙(Amiens)에서 태어나,

이시(Issy)와 생슐피스(Saint-Sulpice) 소신학교를 거쳐 1841년 교구사제가 된 뒤

1843년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442월 류우뀨(琉球)로 발령되어

18449월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Ferreol) 주교를 만나

그의 요청으로 조선 선교사에 임명 받아

그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18457월 하순 상해(上海)로 갔다.

때마침 이곳에 다시 온 김대건(金大建)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여

1012일에 충청도 강경(江景)의 황산포(黃山浦)라는 작은 포구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서울로 올라가고,

다블뤼 신부는 강경지방에서 조선말을 배우며 전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서양인 성직자의 입국사실이 알려짐으로써

그는 박해를 피해 더욱 외딴 곳으로 숨어 다니며 선교에 힘쓰는 한편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을 편찬하였고,

교우들을 위해 교리서와 신심서를 번역 출간하였다.

 

1857325일 조선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우리 이름 장경일 張敬一) 주교로부터

보좌주교로 선출되어 서울에서 아콘(Acones) 명의주교로 성성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1857년부터 자료를 발굴하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하여 프랑스어로 옮기었다.

1859년을 전후하여 그는 윤지충(尹持忠)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사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1862년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를 남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일 달레(Dallet)한국천주교회사가 저술되기에 이르렀다.

이 저술의 대부분이 현재 신리성지에 복원돼 있는 다블뤼 주교관에서 쓰였다.

 

그는 1866311일 신리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당시 국혼에 부정하다고 해서 서울에서 1Km 이상 떨어진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으로 압송돼 330일 참수 당했다.

바닷가에 묻혀 있던 그의 시신은 2주 후 황석두 루가를 비롯한 신자들이 수습,

밤에만 이동하여 부여군 홍산(鴻山)에 모셨다가,

다시 박해가 일어나자 파묘, 18823월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

이후 1900910일 명동성당 지하에 자리 잡았다가 

현재는 절두산 순교자기념관 지하성당에서 영면하고 있다.

신부로 12, 주교로 9, 당시 조선에서 가장 오래 활동하였고,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 가장 능통한 선교사였다.

 

196810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福者位)에 올랐으며,

19845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訪韓)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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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위앵 민 신부 경당>

 

다블리 주교와 같은 날 순교하고, 같은 날 시복되고,

같은 날 시성된 위앵 민(Huin, Martin Luc ) 신부는

18361020일 프랑스 기용벨 지방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직자가 많은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또한 열심한 신앙인이었다.

1851년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랑그르 대신학교에 들어간 후

1861629일 사제서품을 받고 봐세 본당에서 보좌생활을 하다가

186368일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였다.

1864613일 조선 파견을 발령받아 1864715일 파리를 출발,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 신부, 도리(Dorie ) 신부, 볼리외(Beaulieu ) 신부와 함께

길고도 지루한 항해 끝에 중국을 거쳐 1865527일 조선 땅 내포에 첫 발을 디뎠다.

 

다블뤼 안 주교를 보좌하다가 6월에 20리 떨어진 세거리 공소에 부임,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선교에 힘썼다.

1866312일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와 같은 길을 걸어 성인이 되었다.

 

오메트르 신부에 대해서는 <손골성지 2편>에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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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황석두 루가 경당>

 

황석두(黃錫斗 18131866)는 연풍(延豊-충북 괴산군)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20세가 되던 해 과거 보러 상경하던 도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을 만나

성교(聖敎)의 도리를 듣고 크게 깨우쳐,

교리 책을 여러 권 얻어, 과거를 포기하고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격노한 부친의 매질과 반대를 무릅쓰고

3년 가까이 동안이나 함구하며 교리를 탐구하였고,

필경에는 부친과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3대 교구장 페레올(Ferreol ) 주교를 도왔고,

다블뤼 주교를 보좌하여 교리서 번역, 교회서적 출판에 기여했다.

 

18663월 거더리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당하는 다블뤼 주교를

몇 십리나 뒤따라 가다가 또한 체포되어

주교와 운명을 같이 하여 성인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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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손자선 토마스 경당>

  

손자선 토마스 성인은 1844년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형이 1868년에 순교하였고, 당숙 손 니고나오도 순교하였을 만큼

그 집안의 신심은 깊고 열렬하였다.

부지런하고 침착한 성품의 그는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굳은 신앙생활로 명성이 높았다.

 

손 성인의 생가를 주교관으로 쓰던 다블뤼 주교가 18663월 거더리에서 체포된 후

덕산(德山) 관아는 다블뤼 주교로부터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고 기별했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혼자 관아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장은 배교를 설득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고문을 당한 후 해미(海美)로 이송되었고,

해미에서도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혹형을 받았으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공주(公州) 감영으로 이송되어 518일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68106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복자가 되고

198456일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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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 성지>

 

1815년에 지어진, 조선 제5대 교구청이며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었던

손자선 성인의 생가는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 왔다.

1964년 강당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이 진행되어, 2004년 마침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기둥과 뼈대는 물론,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때가 되살아났다.

 

, 안주교,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주고

한국 천주교의 3대 요람중 하나로 꼽히는 신리 성지를 더욱 빛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