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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안팎이 다 아름다운 요당리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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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 성지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기도의 광장과 성인묘지가

시원하게 연결돼 있고,

좌우에 조성된 로사리오길과 십자가의 길은

마치 고요한 숲 속을 가는 듯,

아늑한 분위기로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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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사리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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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길>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성당과, 소성당이 있는 건물은

밝고 시원한 바깥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발길을 이끈다.

특히 자그마한 소성당은 옛 목선 안에 들어앉은 것 같아,

제단 쪽인 선수를 올려다보면

우리가 바라는 어떤 곳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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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당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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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성당>

    

두 성당 모두 한 예술가의 작품인 듯

실내는 목조로 장식했고

예수님 상이나 14처의 조각은 현대적이면서도

무겁고 깊은 믿음의 바탕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 건축물로 1898년에 세워진 중림동 약현성당이

1998211일 방화로 인한 화재로 본당 건물이 훼손됐을 때

그 잔해에서 수습한 못, 철사, 철판, 목재를 써서

요당리성지성당의 조각품들을 만들었으니

오래 묵은 역사의 내공이 배어 나옴은 당연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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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성당 십사처>

    

요당리성지(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 - 楊甘面 寥塘里)

장주기 요셉 성인(張周基 1803 ~ 1866. 3. 30.)이 태어난 곳이다.

성인은 요당리 느지지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舟論)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 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칼레 신부의 보고서는 장주기 성인이 23세 때인 1826년에 배론에 정착했다고 한 반면,

  샤를르 달레 신부는 장주기가 배론에 자리를 잡은 지 12년이 되는 1855년에

  메트르 신부가 그리로 와서 신학교를 세웠다고 기록하는 등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장주기 성인은 훗날 포도청 문초 때 을사년(1845)

   배론으로 이주했다고 진술했으니, 배론 정착 시기는 1845년으로 보는 게 맞다

<차기진 루카 박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기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달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하였다.

186631일 포졸들이 배론신학교를 습격하여 푸르티에(Pourthie, )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nicolas, ) 신부를 체포하자 제천 근처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 서울로 압송되었고,

3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위앵(Huin, ) 신부, 오메트르(Aumaitre, ) 신부, 황석두(黃錫斗) 등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10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방한(訪韓)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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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주기 요셉 성인상>

 

장 토마스 복자(1815 ~ 1866)도 기해박해(1839)와 병인박해(1866) 당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교우촌인 느지지 출생이다.

육촌 형인 장주기 요셉 성인이 배론으로 이주하면서

복자는 배티(梨峙. 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포졸들이 들이닥쳐 복자와 복자 가족들을 모두 체포했다.

진천 관아에 압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청주 병영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014816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되었다.

 

장 복자는 청주교구장 장봉훈 가브리엘(張奉勳) 주교의 5대조이다.

교황청의 시복 결정이 가시화하면서 시복 후보자의 가계도를 정리하다가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1947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1976년 사제품을 받은 장 주교는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장 복자가 정착해 신앙을 전파했던

배티성지 초대 전담신부로 사목하며 성지 조성 사업을 주도함으로서

선조가 씨 뿌린 곳에 꽃을 피웠으니 참으로 오묘한 인연이다.

<뉴시스>

 

얕은 생각으로는, 복자가 토마스 이외에 우리 이름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음이 이상하게 생각되고

아직도 우리 가톨릭의 역사에서 알아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듯 여겨진다.

    

요당리성지는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순교지는 아니다.

다만 순교의 씨가 뿌려진 땅이다.

  

요당리는 교회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민극기 스테파노(1787~1840)성인이 그 책임을 맡았었고

정화경 안드레아(1808~1840) 성인이 공소회장을 맡아

신앙 전파에 힘쓰신 성지이다.

   

또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1796~1839) 성인이 박해를 피해 피신하셨으며

이분의 피신을 돕다가 손경서 안드레아(1799~1839)가 순교한 얼이 서려 있다.

<요당리성지 홈페이지>

 

성지가 있는 양감면(楊甘面)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옛 양간면(楊干面 혹은 楊澗面)과 상홀면(上忽面 혹은 쟁홀면 爭忽面)

그리고 감미면(甘味面)을 합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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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뀌>

 

요당리는 조수가 들어오는 해변 마을이었다.

여뀌(-Water Pepper)가 우거진 연못이 곳곳에 있어

요당(-)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느지지는 이 마을 앞 바닷물이 늦게 들어오고 늦게 빠진다고 해서

'늦어지''느지지'로 변음되었다.

<두산백과>

 

마을에 아담한 연못을 조성하고 빙 둘러 여뀌를 심어놓으면

성지와 더불어 멋진 관광 명소가 되지 않을까, 공연한 훈수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