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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믿음을 가지고 떠난 이들의 죽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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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성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죽림리 703~6)에 있는 죽산성지는

각종 피정, 교육, 회의 등이 많이 열리는 곳으로 익숙하다.

야트막한 구릉 한 가운데, 잘 가꾸어진 성지 입구에 우뚝 솟은 벽돌 건물은

수원교구 영성관으로서, 성전 숙박시설 식당 회의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교구 내 여러 본당들이 편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영성관을 나서면 바로 십자가의 길과 순교자들의 묘소로 이어져

앞서 간 이들의 자취를 되돌아보며 믿음의 자세를 바로잡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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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관>

 

성지의 동편으로 우리 전통의 담장이 길게 벋어있고

그 바깥쪽에 대성전과 소성당이 있다.

매일 미사는 보통 소성당에서 봉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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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한 대성전>

 

죽산성지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스물 네 명의 신자들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치명일기증언록등에서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은,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보로시나 부부, 여기중, 여정문과 부인, 아들 일가,

문 막달레나, 한치수 프란치스코, 유 베드로, 홍천여, 정덕구 야고보,

최성첨과 그의 장남, 이희서와 그의 사위 이진오, 김회장 도미니코,

김인원, 홍치수, 정 토마스, 금 데레사로 모두 24위이지만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 무차별하게 천주교인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 상황으로 보아 순교자들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죽산 순교성지 홈페이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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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묘소>

 

이들 중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차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20148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박 복자는 오 복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교우촌인 진천 절골(,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했다.

교우촌 신자들은 옹기 제작이나, 숯막 운영, 화전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살림은 궁핍했지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여기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95(음력 719)

마침내 경기도 죽산의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박 복자의 가족은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결국 부부가 따로 체포되어,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박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동생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혹 너희가 잡혀 죽지 아니하거든,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부모께 효양하며 살다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게 하여라.”

 

부부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그해 928(음력 813)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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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묘소>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자료가 발굴되지 않았다.

앞으로 성지의 발전과 함께 많은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대나무 동산(竹山)은 고려 초에 기원한 이름으로

마을을 끼고 있는 비봉산의 맥이 대나무 잎을 연상케 하여

죽산이라 한다는 설도 있다.

죽산면은 마을이 커짐에 따라 죽일면과 죽이면으로 나누어졌는데

이 이름들은 섬뜩한 어감이 풍기므로,

가음화(佳音化)를 위해 일죽면 이죽면으로 바뀌었다.

<땅 이름 점의 미학>

 

성지가 있는 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터(夷陳).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 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이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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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둘기에서 온 표지석 바위>

 

죽산에는 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가 있었다.

이 주막거리는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천주교도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 길에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포졸들은 갖은 트집을 잡아 신자들을 두들겨 패곤했는데

그 연유로 이 거리 이름이 두들기가 됐다는 것이다.

 

, 포졸들이 신자들을 호송해서 고개를 넘을 때

신자들은 가족과의 마지막 이별이 안타까워

땅을 치고 두들기며 통곡했다고도 하여

두둘기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지역 개발로 두둘기고개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금도 삼죽면에는 두둘기길’, ‘두둘기삼거리등과 같은 지명이 남아있다.

죽산성지로 들어오는 길에 세워진 큰 표지석이 이 두둘기에서 옮겨온 바위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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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늑한 소성당>

 

이 순교의 땅은 오랜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다가

강정근 마티아 신부(1994. 11. 1. ~ 1998. 1. 30. 죽산성당, 성지 겸임,

이후 ~ 1999. 1. 26. 성지 전담)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피의 현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강 마티아 신부는 매달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미사를 이진터 앞에서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여서 먼지와 소음으로 미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웠고,

더구나 겨울에는 천막 속에서 추위와 싸우면서도 미사를 거르지 않았다는 고생담을

90년대 말에 강 신부로부터 직접 들은 기억이 난다.

 

신자들과 한마음으로 황무지에 호박을 심고, 신자들 집에서 생산 된 포도를

서울 각 성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아,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교구 내 각 성당에 호소, 후원 회원을 모집하여,

그들이 내준 성금으로 땅을 사서 1차 개발을 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의 죽산성지로 성장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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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 입구 대문>

 

작년 6월 제 4대로 부임한 손용창 베드로 주임 신부의

강론 말씀은 내가 가진 것을 생각하라.였다.

순교자 묘소를 둘러보면서 계속 그 말씀이 떠나지 않는다.

 

이들은 가진 것을 모두 흔쾌히 버리고

   오직 하나 가진 것, 믿음과 함께 하늘에 올랐구나!”

나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