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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수난의 걸음걸음 250--- 충청수영(忠淸水營)

 

충청수영에서 내려다 본 천수만.jpg

                                           <충청수영에서 내려다 본 천수만>

 

1863128(양력 1864. 1. 16.) ‘강화도령철종(哲宗)이 별세하자,

이하응(李昰應)의 차남 명복(命福)이 12살 나이에 조선 26대 왕이 된다(高宗).

 

1866년 대원군 이하응은 아내(府大夫人 驪興閔氏)의 남동생 민승호(閔升鎬)

양자로 들어간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이름이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 네이버 지식백과)을 왕비로 간택하여, 320일 책비례(冊妃禮)를 거행하였다.

그 때 민치록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나 민규수는 고아였고,

주위에 힘을 쓸 친척들이 없었기 때문에,

정권을 잡고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외척들의 발호를 못마땅해하던

대원군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 당시는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몰아칠 때였고,

한양 포도청에 갇혀 있던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 등 다섯 명이

323(27)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다.

 

국혼을 한 달 앞둔 궁중에서는 무당들을 불러 점을 쳐 본 결과,

한양에서 피를 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다.

과연, 국운이 흥하고 쇠하는 것이 사형집행 장소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사형장을 바꿔가며 결혼한 명성황후는 왜 그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점을 쳤던 무당들의 뒷얘기가 궁금할 뿐이다.

    

충청수영성-01-01.jpg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1509(중종 4) 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

    서해를 통해 침입해 들어오는 적을 감시하고 물리치기 위하여 쌓았으며

    1896(고종 33) 폐영되었다고 한다.>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회장, 장주기 요셉 등

다섯 명의 사형 집행지는 한양에서 250리 떨어진

충남 보령의 충청수영으로 결정되었다.

   

충청수영(保寧)은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 등을 막기 위해서

경상좌수영(東萊) 경상우수영(巨濟島, 뒤에 統營) 전라좌수영(麗水)

전라우수영(海南)과 함께 설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휘하에는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8,414명이 있었다고 하니 <위키백과>,

상당히 크고 중요한 해군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영보정-01.jpg

 <영보정(永保亭) : 1504년 수사 이 량(李 良)이 지었다. 바다 건너편 황학루,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왔다.

   특히 백사 이항복과 다산 정약용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라고 묘사했다.>


 

충청수영이 있던 오천군(鰲川郡)1914년 보령군에 합쳐져 오천면이 되었다.

오천이라는 지명은 북쪽에 면해 있는 천수만(淺水灣) 양쪽 하단의 모양이

자라의 모양과 같고(=자라 오), 천수만 중간을 천수가 흐른다 하여

오천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국지명유래집>

 

사형수들을 충청수영으로 보낸 것은 이곳이 서해의 작은 섬 외연도(外烟島)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18466월 프랑스 해군 세실(C´ecille, 瑟西爾, 1787~1873)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한강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입구를 찾지 못 해 외연도에 정박하여

임금 헌종에게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 1803~1839, 베드로)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 등 3명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국서(國書)를 남겨 놓고 돌아갔다.

그 내용은 프랑스 인 처형에 대한 항의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계속된다면

본국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협박이자 문호 개방에 대한 압력이었다.

    

오천항-01.jpg

                                         <오천항>

 

조정에서는 이 협박에 대해 논의한 결과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당시 옥에 갇혀 있던 김대건 신부를 앞당겨 처형했다.

 

세월이 흘러 대원군이 집권하자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외세에 맞서는 척화정책(斥和政策)으로 돌아섰고,

이를 천하에 알리는 상징의 하나로서

외연도가 보이는 충청수영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처형하게 된 것이다.

 

한양에서 1866323사형 선고를 받은 다섯 성인은

수난의 길 1백 킬로미터를 끌려가 329일 충청수영에 도착,

하룻밤을 묵고 형장의 이슬되어 승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