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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55녀의 생가 터 마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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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성지성당-01>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鳥安面)에 있는 마재성지(馬峴)

나주 정()씨 약현(若鉉),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약횡(若鐄) 5형제와

누이 5명의 고향으로, 한국 천주교회 요람지 중 하나다.

이 남매들과 그들을 둘러싼 인맥에서 우리나라의 천주교가 시작된 것이다.

 

장남 약현은 1751,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의령남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정조 19(179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은 얻지 못했다.

경주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처남 광암 이 벽(曠菴 李 檗)

한국 천주교를 창설하였고

이복 여동생의 남편은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세례자인 이승훈(李承薰)이다.

맏딸 명련의 남편인 황사영(黃嗣永)은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제천 배론으로 피신하여 백서사건(帛書)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황사영은 참형을 받았고 명련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노비가 되었다.

약현은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향집을 지키다가

순조 21(1821) 전염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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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형틀>

 

약현의 어머니 의령남씨에 이어 들어온 후실 해남윤씨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5대 손녀,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로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이승훈의 부인이 된 딸을 낳았다.

 

약전은 1776(영조 52)에 호조좌랑이 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 가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과 교유하기 시작했고,

성호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777(정조 1)부터는 여주 주어사(走魚寺)의 강학회에

동생 약용과 함께 참여,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었고

17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조좌랑을 역임했다.

 

동생 약용과 함께 사돈 이 벽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듣고

빌린 책을 통해 천주교에 심취했으며

1785년 김범우(金範禹) 집에서의 공동집회에 참석하는 등

조선 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후에 두 형제는 천주교와 거리를 두게 되었으나

반대파들은 천주교도였던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형제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결국 1801(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로 권철신 등이 사형을 당했고

약전은 신지도(薪智島), 약용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약전은 우이도(牛耳島- 소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814년 흑산도에서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玆山魚譜. 자산은 흑산도)를 썼고

1816년 우이도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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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종 동산 - 내게로 오라>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는 이 익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도교를 연구하다가 뒤늦게 천주교를 접했다.

천주교 교리를 신봉하여 집안의 제사를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강 건너 분원리에서 살았다.

신자가 된 이후 1795(정조 19)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맞아들이고,

1799년 서울로 옮겨와 조선천주교 초대 회장을 지냈다.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집필 중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했다.

한자를 모르는 신도를 위해 우리말로 쓴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남겼다.

 

약종의 장남 복자 정철상 가롤로(丁哲祥. ?1801)는 부친이 체포되자

감옥 근처에 머무르며 부친을 봉양했고

이해 48일 부친이 순교하자마자 곧 체포되어

514일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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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상 가롤로>                      <정하상 바오로>

 

둘째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1839)는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

나 베드로(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18397월 모친 유조이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된 하상은

<상재상서>를 써서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호교문이며

뒤에 홍콩에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922일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17611839)는 정약종의 둘째 부인이며

성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철상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서 지냈다.

기해박해 때 아들 하상, 딸 정혜와 함께 체포되었다.

72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고,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함으로서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가 되었다.

 

       유조이 체실리아-02.jpg             정정혜 엘리사벳-02.jpg

          <유조이 체칠리아>                   <정정혜 엘리사벳>

 

동정 순교자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

정약종의 딸로, 네 살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39년 서울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며 320대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12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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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묘소>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1762 ~ 1836)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므로

천주교와의 관련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는 1770년 후반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기 시작하였고,

1784년 수표교 이 벽의 집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으나

곧 다시 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787년에는 이승훈 등과 함께 서학서를 읽는 등

신앙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음을 당하고,

천주교 탄압이 거세지자 그는 분명히 배교하는 자세를 밝혔다.

 

그러나 1797년 다시 서학도로 지목 받자

그는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이를 반박하고

1799년에는 척사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하여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 신자임을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조동섬, 황사영 등을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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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1818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하고

자주 대재(大齋 단식재의 전 용어)를 지켰으며

외부와의 연락을 삼가며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고

달레(Dallet)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저술을 위한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47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

<가톨릭사전>

 

막내 아들 약횡(丁若鐄 1785~1829)은 이복동생이다.

약횡은 서출(庶出)이어서, 의원이 되어 환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

그의 행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다산은 이 아우를 사랑하여

두 차례에 걸쳐 14칙에 달하는 당부 서신을 써준 것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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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