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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증거자 박순집과 순교자 3위의 갑곶 성지

    

갑곶성지와 성당-02.jpg

                                              <갑곶성지와 기념 성당>

 

 

강화도는 양세(洋勢)와 바로 만나는 최전선이었다.

그중에서도 갑곶은 밀려들어오는 양세를 막는 방파제였다.

 

 

강화도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양호 사건(1875)에서 강화도 조약(18762)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외세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양세와의 관계가 악화될 때면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 지게 마련이었다.

 

 

이 강화도에서도 가장 외침이 잦았던 곳이 갑곶이다.

갑곶은 고려 고종(高宗, 재위 : 1213~1259)이 원나라의 침공으로 피난할 때,

군사의 갑옷만 벗어서 쌓아도 건너갈 수 있을 거라고 한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을 만큼, 큰 개천 정도로 밖에는 볼 수 없는 해로를

앞으로 한 방어 진지였다. <갑곶성지 홈페이지>>

 

    

염하-02.jpg

                                                       <鹽河>

 

 

염하는 강화도와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이다.

마치 강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온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으로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치른 격전지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직까지 우리나라 순교자들 모두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부분이 우리나라에 파견돼 왔던 프랑스 사제들에 의해 밝혀졌는데,

이에는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공로도 매우 컸다.

박베드로는 시복 수속 작업이 시작되자, 아는 바를 교회 법정에서 진술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이 기록이 박순집 증언록’ 3책으로 남아

절두산성지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산백과>

 

 

박순집(1830 ~ 1911.6.27.) 은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다를 부모로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 조선시대 궁중의 제향(祭享) 빈례(賓禮)

사여(賜與)에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관서.

현 용산구 후암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 바오로는 성 앵베르(池世亨) 주교, 모방(羅伯多祿) 신부,

샤스탕(鄭牙各伯) 신부와 한국인 신자들이

1839921일 새남터에서 처형되자 그 시신들을 노고산에 안장하였고

1843년에는 그 유해를 박씨 집안 선산인 삼성산(관악구 신림동)에 이장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박순집에게 전함으로써

19011021일 시신이 발굴되도록 하였다.

 

 

또한 바오로는 성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기에 앞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시신을 찾아내 와서(瓦署 - 조선시대 궁궐 조성에 소용되는

기와·벽돌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한성부 남부 용산 동쪽

둔지방 - 屯之坊, 현 용산구 용산동 - 에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안장하였다.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보았다고 한다.

    

                           박순집 베드로-01.jpg

                                              <박순집 베드로 영정>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 브르트니에르(1838~1866 유스토)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신부,

도리(Dorie 1839~1866 헨리코) 신부,

프티니콜라 미카엘(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신부,

푸르티에 가롤로(Pourthi´e 申妖案 1830~1866) 신부와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1845~1866) 등이 37일과 11일 새남터에서 처형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하여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박 베드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28()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14()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7일과 9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 형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왜고개에 모셨다.

 

 

병인박해로 박순집의 가족도 18661017

형 요한의 아들 박 바오로(20), 고모 박 막달레나,

1868329일 부친 박 바오로(63)가 잡혀 처형당한 것을 비롯,

일가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박베드로는 가족들의 시신도 찾아서 안장하였다.

 

 

박해가 철회된 1876,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요한)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의 딸 원()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 신부, 블랑(Blanc, ) 신부 등을,

1877년에는 리델(Ridel, , 6대 교구장) 주교,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 등을 입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888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프오델()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프오델 신부는 박순집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기 권 타대오에게는 한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증언록이 작성되었는데,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갑곶성지 홈페이지>

 

 

  증거자 박순집 묘-02.jpg

                                          <증거자 박순집의 묘>

 

 

그리고 18991030,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학교에 안장되었고,

19011021일에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찾아 명동성당에 안치하였으며,

1909528일에는 노고산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 형의 시신을

명동 성당으로 모셨다.

 

 

박순집은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1878년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 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입회시켰다.

박 수녀는 조선인 최초 5명의 수녀 중 한 분이 되어

95세에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이 글은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의 내용으로

아버지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벅순집은 1890년 전교의 포부를 펼치기 위하여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 베드로는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전력 보좌하고

191162782세에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혔다가

1961831일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옮기고

2001524일에는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의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성지로 천묘하였다. (두산백과)

 

 

 

  순교자 3위 비-02.jpg

                                                   <순교자 3위 비>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효수되었다.

이들 세분의 순교자에 대해서는 세례명, 후손, 생애 등의 기록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 순교 성지 조성을 시작하였고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35, 갑곳리)

기념성당을 지어 200312월 초대 주임으로 조명연 마태오신부가 취임하였다.

 

 

조 신부는 빠다킹이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지금까지 매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등 좋은 글을 써 내고,

방송도 진행한다.

 

 

                                          빠다킹 조명연 마태오 신부-01-01.jpg

                                                   <빠다킹 조 마태오 신부>

 

 

집사람과 함께 갑곶성지를 찾아간 날

놀랍게도 빠다킹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고 성지 해설까지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체류하던 중 교구장이 전화를 걸어와,

   갑곶성당에 한 번 더 가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아니, 전에 근무하던 곳으로 다시 발령을 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네, 하고 10년 만에 원대 복귀했지요.’

조 신부는 2016111일 제7대 주임으로 두 번째 부임했다.

 

 

목소리가 매끄럽다고, 빠다처럼 부드럽게 나온다고

신자들이 빠다킹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조 신부는 빠다킹의 명성에 걸맞게

깊이 여운을 남기는 말씀으로 해설을 마쳤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