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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다섯 순교자들만이 알려진 양주 관아(楊州 官衙)

    

양주관아-025-01.jpg                                            <복원된 양주 관아>

    

 

의정부에서 동두천 방향 3번 국도로 양주시청까지 가서 좌회전,

98번 도로 광적면(廣積面))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양주 관아 건물들이 나타난다.

(양주시 부흥로1399번길 15. 유양동 141-1.)

 

조선 시절 백성들을 벌벌 떨게 만든,

위엄만 가득하던 청사들은 자취 없이 사라진지 오래고

경기읍지 발굴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양주시가 복원한

동헌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병인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명단과 그 약전을 수록하여

1895년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간행한

치명일기(致命日記)에 따르면 양주 관아에서는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박서방, 김윤호 요한과 권 마르타, 김 마리아 등

다섯 분이 치명 순교하였다.

<의정부교구 양주 관아 성지>

    

 양주관아-02 (2)-01.jpg

                                                 <매우 쳐라!>

 

 

홍성원 아우구스티노는 양주 일담리 출신으로 포천 고약리에 거주하다

1868519일 양주 포교에게 체포돼 46세 나이에 처형당했다.

 

양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55세의 박 서방은

양주 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홍주에서 치명한 박사행의 부친이다.

 

이 두 분만이 양주 출신이고

용인에서 잡힌 다른 세 분은 양주와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다.

 

덕산 출신 김윤호 요한은 용인 굴암에서 거주하다

186610월 부인 권 마르타와 함께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용인 한덕골에 거주하던 김 마리아는 42세 때인 1866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순교했는데

중국에 들어가 죽은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다.

<치명일기>

    

양주관아-02 (4)-01.jpg

                                              <주리를 틀라!>

 

 

이들이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양주에서 순교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해 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기독교는

초기 교회 이래 신앙을 지켜 오던 포천과 마재,

19세기 전반과 중반기 새로이 등장한 고양과 송도 지역이 중심을 이루며,

이어 송도에서 장단, 고양에서 파주, 포천에서 양주 등 주변 지역으로

신앙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양주는 고대부터 한강 연안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항상 국토의 요충이 되어, 서울의 상당 부분과 남양주시 구리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등을 포괄하는 큰 시였지만 지금은 모두 분리되어

경기도에서도 크지 않는 시에 속한다.

    

 동헌-02(3)-매학당-01.jpg

                                                    <동헌(東軒) - 매학당(梅鶴堂)>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지배하였다.

고려 태조 때부터 양주라 불렸으며

한양부(漢陽府) 남경(南京) 이 되기도 했다가

1395(태조 4) 양주부로 승격되었고,

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다가 1896년 경기도 양주군이 되고

20031019일 양주시로 승격하였다.

 

 

관아에 들어가기 전 오른 편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양주 목사들의 송덕비들이 늘어서 있다.

모두 18기 중 17기가 송덕비, 1기는 관아 복원을 기념한 유허비이다.

 

송덕비-02-01.jpg       송덕비-01-이  완 대장 (1)-001.jpg

                        <송덕비들>                                                       <이 완 대장 송덕비>

 

 

비석들 중,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 ~ 1805)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에 포도대장으로 등장하는

이 완의 송덕비가 눈에 뜨인다.

 

이 완(李 浣 1602 선조 35 ~ 1674 현종 15) 은 실존 인물로

효종의 북벌정책에서 중책을 맡은 무인이다.

형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포도대장으로서만 진력한 훌륭한 무관으로 존경 받은 분을

연암이 슬쩍 허생전에 등장시킨 것이다.

이 포도대장은 16434월 양주목사로 부임했다가

5월 경기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에 임명되어 이임했는데

1개월 근무한 목사에게 송덕비를 세워줬다는 것도 이상하고

비석 건립이 1643년으로 돼 있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내 일방적인 생각으로는, 이 대장이 온 조야의 흠숭을 받은 연후에

이 비석도 세워 드린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별산대놀이 마당-01-01.jpg

                                                    <양주 별산대놀이 마당>

    

 

관아 오른쪽에는 양주 별산대놀이 마당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양주 별산대놀이

양주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 중의 하나로,

경기도 지방에서 널리 연희되던 대표적 서민오락의 하나였다.

사월 초파일·오월 단오·유월 유두·칠월 백중과 같은 대소 명절 때

마을의 노천에서 연희되었는데, 10시에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산대놀이는 애오개산대놀이가 가장 유명했고,

노량진, 녹번, 퇴계원, 송파산대 등의 공연이 있었는데

양주에서는 이들 원조 산대놀이에 거드름춤과 깨끼춤으로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고, 서민의 애환을 풍자하는 덕담과 재담을 가미하여

별산대놀이라 칭한 것이다.

 

산대놀이(山臺戱)는 섣달 그믐날 밤 민가와 궁중에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던 의식인 나례(儺禮),

중국 사신 환영행사 등에서 설치했던 무대인

산대(山臺)에서 놀았던 연희들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별산대놀이 <한국전통연희사전>

 

양주는 사면이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유적 미술관 등 볼거리, 놀거리가 많은 곳이다.

그러나 가톨릭 성지로서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안타깝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치명일기에 기록된

정확한 치명지를 찾았고, 앞으로 치명 성지로 가꾸어 나갈 예정이라니

기대가 크다.

    

별산대놀이 전시장 (2)-01.jpg

                                                                   <양주 별산대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