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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34명의 순교자가 묻힌 남종삼 성인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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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가 앞에 세워진 남종삼 성인 흉상 >

 

남종삼(南鍾三) 성인은 우리나라 순교자 중 가장 높은 벼슬을 산 분으로,

우리 역사를 바꿀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시도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정세 전환으로 모반부도(謀叛不道-국가 전복을 꾀함) 죄인이 되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斬首) 당했다.

남 성인의 계획이 성사되어 나라가 개방되었으면

우리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남종삼 개인은 고위 관리로 오랜 삶을 살다 종생(終生) 하기 보다

목숨을 바쳐 성인위(聖人位)에 오름이 훨씬 영광스럽지 않았을까?

 

 

1860(哲宗 11) 영불군(英佛軍)과 청국(淸國) 간의

2차 아편전쟁을 조정하여 북경조약을 성립시킨 대가로

러시아는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함으로서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러시아는 1864(高宗 1) 이후 통상을 요구하며 자주 국경을 넘어 와

국사를 장악하고 있던 흥선 대원군의 고뇌를 깊게 했다.

이때에 천주교인 홍봉주(洪鳳周) 김면호(金勉浩) 등이,

프랑스 영국과 수교하여 러시아의 침노(侵擄)를 막자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올렸으나

대원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에 승지(承旨)로서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맡고 있던 남종삼이 나서서

대원군을 만나 방아책을 설명하였고,

대원군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베르뇌(Berneux), 다블뤼(Daveluy) 주교와의

회동을 주선하라고 지시했다.

 

남종삼은 이들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조선이 프랑스 영국 등과 동맹,

러시아의 남침을 제어하는 동시에 쇄국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의 자유를 구현케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방 사목여행 중이던 주교들과의 연락이 여의치 않아

그들은 수개월 지난 1865129일과 13(음력)에야 상경했다.

이 동안 러시아의 월경이 잠잠해져 북변의 긴장이 완화된 한편

반대원군 정객들이 대원군의 천주교 접근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국에서 천주교 박해가 강행되고 있다는 잘못 정보가 보고돼

정치적 생명에 불안을 느낀 대원군은 정책을 급선회,

1866년 구정을 전후하여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

남종삼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제천 땅 묘재(山尺)로 낙향했다.

    

남종삼 성인 묘.JPG

                                                          <남종삼 성인 묘소>

    

 

천주교도 체포가 진행되자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 마을에 피신 중이던

남종삼도 잡혀 정월 15(음력)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다가

정월 21(양력 37)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의령(宜寧) 남씨인 종삼은, 1817년 충주에서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후사(後嗣)가 없는 백부 상교(尙敎)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1838(헌종 4)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영해현감(寧海縣監 - 지금의 경북 영덕군)을 거쳐 좌승지를 지냈고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순교자 3대의 묘.JPG

                                          <순교자 3대의 묘 - 규희 상교 종삼>

    

 

일찍이 천주교 신자가 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뒤 열렬한 신자가 되어

베르뇌(Berneux) 주교를 자기 집에 숨겨 두는 등

신앙 활동에도 정진했다.

19845월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에 시성되었다.

    

 

남 요한의 시신은 참수된 후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명동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으며

1968년 시복을 계기로 절두산성당 지하로 옮겨졌다.

<향토문화전자대전>

2002년 강화도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에 세워진 성 남종삼 기념관에도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일부는 바티칸 교황청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도

성인의 묘가 있다.

 

의정부에서 고양 방면 39번 도로로 진행하다

송추 직전 오른쪽에 길음동 성당 묘원이 있다.

묘원 입구를 들어서서 왼쪽 언덕 끝이 가족 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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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남종삼 요한 묘역>

    

 

남 성인의 양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1783~1866)

충북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白雲面 花堂里)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충청목사(忠淸牧使),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역임했다.

<가톨릭사전>

1827(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들이 순교하자 그는 고향에서 잡혀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84세 고령으로 아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일가족이 다 체포되어 큰 아들 규희(揆熙)는 전주진영에서 순교하였고

처 이소사(李召史), 차남 명희(明熙)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昌寧)으로 유배되어 노비로 살았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남종삼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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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사의 묘>

    

 

살아남은 명희의 자손들은 모두가 다

성인의 후손으로서 훌륭한 가톨릭 가문을 이었고

5대손인 남재현 디모테오 신부는

가톨릭 관동대학교 부교수로 성직에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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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성인은 여기에 누워 도봉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 넘어 엄청나게 변한 한양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에 잠겨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