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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9 23:04

智異山 賢者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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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엘 다시 올랐다. 지리산대장 이태극 민병수 민범식 유근원, 넷이 함께 했다.
이번엔 함양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따라 세석으로 오른 뒤, 반대편 산청 거림으로 내렸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밤12시 고속버스를 타면 3시간 40분이면 백무에 내려 준다.
내리자 바로 산행길에 든다.
깊은 밤 산 들머리까지 태워다 주는 버스가 고맙고, 이렇게 노선을 연장시켜준 함양군수가 고맙기 그지없다.
때문에 무박 2일 지리산 산행이 가능해진다.

스틱 펴 짚고 헤드랜턴 쓰고 곧바로 산행 시작, 6월 18일 새벽 4시.
캄캄한 밤 산행의 묘미를 말로 그리기란 쉽지 않다.
바닷가 모래알처럼 밤하늘 가득히 휘뿌려진 별들이 차라리 휘황한 샹들리에보다 밝다. 저 별들이 금방이라도 싸래기눈처럼 머리 위로 와락 쏟아져 내릴 듯하다.
그러나 진짜 묘미는 적막감이다.
아무런 빛과 음향이 없어, 눈과 귀가 손님 없이 조용히 남았다. 그래서 상념조차도 스스로의 속으로 숨어버린 적막. 그 속을 걷는다.
지난 2월 같은 시각 지리산 장터목 산행 때에는 이 적막을 오래도록 지녔다. 그래서 더할 수 없이 좋았었지만 불행히도 이번 여름산행에선 밤하늘이 너무 일찍 벗겨지고 말았다.
한 30여분 오르니 벌써 하늘의 별빛은 스르르 삭아버리고 산등성이가 나무 틈 사이 실루엣으로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오늘 어떤 이는 새벽 1시 15분에 올랐다고 세석에서 누가 일러준다.

자료상 이번 산행길은 6.5킬로 거리를 4시간 걸려 오르고, 6킬로 하산길을 2시간 반에 내릴 것이라 한다.
우리 실력으론 어차피 50퍼센트는 늘려 다시 잡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시간은 한없이 늘어진다. 가다 쉬고, 잠시 후 또 쉰다.
이렇게 자주 쉬는 이유 중에 제일 큰 탓은 담배다.
‘아직도’ 골초인 병수와 태극에겐 쉬는 시간이야말로 정말 '재충전'의 시간이다.
(이 친구들은 아마 그 일도 피우며 쉬며 할 게다.)
병수의 느린 걸음을 신선걸음하냐고 핀잔했더니 그 응수가 멋지다.
“마음이 걸음을 앞서지 말고, 걸음이 숨을 앞서지 말거라.”
유머의 달인에게서 인생의 교훈도 얻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이와 반대로 살았다 싶다. 그리해야 마땅한 일이라 여겼다.

지리산은 외관상 육산(肉山)이다.
빽빽한 나무숲을 보면 편안한 흙길이리라 예상한다. 그러나 천만에, 예상은 단지 기대로 끝나고 만다. 단양 금수산처럼, 길은 온통 돌 돌 돌 투성이 너덜길이다. 돌을 건너 돌머리를 짚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멋대로 생긴 돌들은 발 놓을 자리를 도시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걷기(트레킹)엔 차라리 삼각산 같은 골산(骨山)이 솔직해서 더 편하다.
표고 500미터에서 시작한 산길이 1000까진 완만하게 오르더니 1000부터는 갑자기 각을 세운다. 태극은 세석 1530까진 내내 이렇다고 겁을 준다.
남은 거리가 고작 1킬로이니 표고차 500을 단지 거리 1000으로 올라야 하는 것이다. 산길이 구불구불한 것을 감안하면 기울기를 45도쯤으로 봐야 할 듯하다. 아무튼 엄청나다. 다음 발걸음 놓을 자리가 가슴에 닿아 있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10시 반.
세석평전은 아고산대(亞高山帶)로, 질펀히 펼쳐진 산록이 철쭉과 낮은 구상나무들로 다시 덮여가고 있다. 무분별한 야영으로 벌거숭이를 만들어 놓았던 과거를 치유 중이라 한다.

거림으로 하산길을 택한 것은 대장 태극의 배려다. 지리산 등산로 중에 제일 편하다 했다.
양쪽 인공고관절의 나에겐 내림길이 무척이나 어렵다. 충격을 피해야 하고, 자세와 각도에 제약이 있고, 고관절이 비틀리면 탈구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조심이 몸에 붙었다. 힘이 더 든다.
145센티 짜리 긴 스틱을 놔두고 115센티 짜리 짧은 스틱을 가져온 것이 무척 후회스럽다.
다리에 젖먹던 힘까지 넣어야 했다.
1킬로쯤 내렸는데 오른쪽 넓적다리 안쪽 근육에 쥐가 난다. 오르는 길에 힘도 많이 썼던 터. 태극은 부랴부랴 신발부터 벗겨 내더니 두 손으로 빠르게 마사지를 해준다.    
5킬로나 남은 길, 쥐가 또 올까 난감하다. 아예 재발할 듯 싶으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린다. 다행히 이후 쥐는 미리 잡았다.
역시 편한 길이어서 쉬이 내려, 4시간.
그러나 이 길로 오르기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다.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차라리 한신계곡의 어려웠던 길이 훨씬 재미있다.
대장 태극은 벌써 지리산 주변 여러 지점에 전용 택시망을 갖춰 놨다. 내릴 곳이 가까워 오니 휴대폰으로 자기 택시를 호출한다. 거림매표소를 빠져 나와 입구 매점에서 주스 한 병씩 사 마시고 나니 벌써 택시가 대령했다고 신고한다.
진주로 나와 오후 6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탄다. 드디어 잠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진다.

智異山은 ‘어리석은 이가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한다.
청학동 사람들이 지혜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지리산엘 자주 오르면 지혜로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