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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두 분 바르바라 순교자의 백곡성지와 동골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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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누이와 올케 두 바르바라의 묘소>

 

배티성당에서 멀지 않은 큰 길가의 백곡성당(충북 진천군 백곡면 백곡로 892)

종탑 바로 앞에 두 분 순교자가 모셔진 무덤이 나란히 있다.

오른편이 시누이인 남원 윤씨 바르바라의 무덤이고,

왼편에 올케 밀양 박씨 박 바르바라가 잠들어 있다.

 

홍주에서 살던 남원 윤씨 21세 손 윤행윤은 박해를 피해 배티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곳에서 병인박해를 당해 손녀 윤 바르바라와

손자며느리 박 바르바라(1827~1866. 23세 손 윤태명 요셉의 부인)가 체포됐다.

두 분은 옥중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매를 맞아 순교하였고,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배티 뒷산 성재(지금의 6인 무명순교자 묘소)에 묻었다.

 

윤 바르바라의 아버지 윤기현 바오로(1794~1867)와 어머니 김 루치아(1801~1867)는

병인박해를 피할 수 있었으나 이듬해에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루치아가 1867년 8월 12일 목숨을 바쳤고, 11월 15일에는 남편 바오로도 순교했다.

루치아의 무덤은 배티 고개 무명순교자 14인 묘역 중 맨 아래 것으로 추정되며,

바오로의 무덤은 목천 성거산 아래(천안시 직산 석점)에 모셔져 있다.

 

윤 바오로의 후손들은 이후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다가 바오로의 아들 윤태명 요셉의 외손주 사위인 원두현씨가 배티에 살게 되었고,

아산 도고 유동에서 살던 바오로의 고손 윤재웅 베드로는 청양 깊은 산골로 이주하면서

할머니들의 무덤이 분명한 성재 묘소의 벌초를 원두현 씨에게 부탁했다.

원 씨는 평택으로 이주하게 되어 배티 박 회장에게 벌초를 맡겼고,

이후 박 회장의 아들 박진규 씨가 계속 무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목천에 살던 25세 손 윤예섭이 평택으로 이주하면서

우연히 고종 매형인 원두현 씨와 이웃해 살게 됨으로서

1970년대 초에 박진규 씨를 통해 할머니들의 무덤을 확인하게 됐다.

 

1977년 평택에 사는 후손들은 무덤들을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배티를 찾았다.

이를 알게 된 배티와 백곡공소의 신자들은 후손들을 만나

“선산에 가신다 해도 후손들이 잘 모신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곳에 모셔 두면 우리 교회에서 대대로 잘 돌보며 기도드릴 수 있을 것이니,

이곳에서 그냥 모시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하여 백곡공소에 자리 잡게 되었다.

<류한영 차기진 공저,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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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곡성당>

 

 

백곡 성당은 박해 시대를 거쳐 신앙을 자유를 얻은 뒤 여러 번의 이전을 거쳐

1961년 7월 21일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진천 본당 제2대 주임 아헌 굴리엘모(W. Aheam. 安) 신부가,

기존의 공소 건물로는 도저히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 고심하던 중

경주 이씨 문중에서 현재의 대지를 기증받아 임시로 공소 강당을 지었다.

그 후 산업화와 이농 현상으로 신자 수가 급감하면서 증축하지 못하고

보수 공사만 거듭하다가 1997년 교육관을 신축했으며,

2018년 11월 20일 새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했다.

청주교구는 2019년 8월 16일 진천 본당 관할 백곡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복자 오반지 바오로(본 연재 ‘77. 순교자들 묘소’에 소개)를 주보로

백곡면 전체를 담당토록 했다.

<백곡 성당 순교자 묘 성지, 가톨릭 성지 목록>

 

 

동골 교우촌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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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아의 집>

 

배티 일대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의 보금자리요 중심지였다.

또한, 이곳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최양업 신부의 저술 활동이 이루어진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귀국 초 최 신부가 서한을 쓴 곳으로는 동골 외에도 도앙골(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과

진천 절골 등이 등장하지만, 최 신부 셋째 아우 최우정(바실리오)의 장남

최상종 빈첸시오가 쓴 ‘최양업 신부 이력서’와 ‘최 바실리오 이력서’ 등에 따르면,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자신의 사목지로 진천 배티를 배정하자

즉시 동골로 와서 몇 해를 머무르며 전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자로 쓴 편지에도 동골이 발신지로 되어있다.

 

최 신부는 성실한 교우 송구현 도미니코(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가 정숙함을 알고 두 동생과 결혼시켰다.

최우정 바실리오는 송 막달레나와 결혼한 후 수년을 동골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다니며 묵주와 상본을 만들어 팔고

송 막달레나는 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했다.

그 후 짚신 장수를 하며 박해 시대를 넘긴 우정은 위로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아나타시아)에게서 박우철 신부(1884~1956)를 배출했다.

 

최우정은 블랑 신부(후에 제7대 교구장)의 복사가 되어 가정은 돌보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다가 1886년(56세 정도)에 유행하던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무아의 집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 동상-01.jpg           무아의 집 (3)-01.jpg

                 <최양업 신부 동상>                                     <무아의 집 야외 성전>

 

현재 동골에는 1999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신축한 ‘무아의 집'과 성당이 있는데,

무아의 집(진천읍 문봉리 354~1)은 매년 4백여 명이 찾는 피정의 집이다.

 

 

진천 동골의 위치에 대한 이견

 

동골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진천 지역 여러 곳에 동골이라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가 거처하던 동골로는, 문봉리 동골, 연곡리 동골(쥐눈이 동골),

백곡면 용덕리 동골(느릅실 동골), 백곡면 양백리 동골(절골),

이월면 동성리 동골 등이 있으나, ‘문봉리 동골’과

‘백곡면 새터 인근의 배티 동골’ 의 두 견해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 문봉리 동골이라는 주장

문봉리 동골을 처음으로 주장한 이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김 막달레나 수녀.

1970년대 배티성지에서 소임을 맡고 있던 김 수녀는 동골을 확인하려고

배티 인근 마을과 골짜기를 답사하던 중 많은 숯 구덩이와 옹기 터를 찾았고,

이 마을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유봉열 할머니를 만나 증언을 들었다.

1978년 6월 20일경 녹취한 유 할머니(1992. 3. 21. 89세로 작고)에 따르면

“이곳에서 음력 3월과 동짓달이면 흰 두루마기에 큰 갓을 쓴 선비들과

  잘 차려입은 부녀자 70~80여 명이 안성, 천안, 목천 등 사방에서 모여들어

  저녁에 큰 제사를 지내고 날이 밝으면 부리나케 흩어졌다.”라는 말을

시어머니와 시할머니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 배티 동골이라는 주장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선구자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1922. 11. 27 ~ 2009. 7. 20.)과

교회사학자 오기선 신부(吳基先 1907년 11월 5일 ~ 1990년 7월 30일)의 주장.

 

배티 일대 10여 개 교우촌이 모두 배티를 중심으로 반경 4km 이내에 위치해 있지만

문봉리 동골만 유독 그 반경에서 10km 떨어진 곳으로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 중심지와 피난처 루트에서 벗어나 있다.

 

또 문봉리 동골에는 신자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박해로 인한 약탈로 흔적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배티나 삼박골 등 다른 교우촌은

신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858~1861년 배티에 거주하면서 최양업 신부 임종 때 종부성사를 준

프티니콜라 신부의 증언이나 칼래 신부의 기록에 보면,

문경새재-괴산-진천 덕문이뜰-백곡-진천 냇물-용진골, 삼박골 등

배티 일대 교우촌을 돌아다녔다고 돼 있어서

문봉리는 이 사목 활동 루트에 빠져 있으므로, ‘배티 동골’이 더 신빙성이 있다.

<진천 동골 교우촌 성지 홈페이지>

 

앞으로 계속 연구해서 밝혀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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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아의 집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