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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웅부공원에 재현된 안동 관아

복원된 안동관아-01.jpg

                                        <복원된 안동관아-영가헌>

 

경북 안동 지역에서는 BC 1만년 대의 유물 371점이 발굴되어

선사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신라 혁거세 원년(BC57)에는, 염상도사(念尙道士)가

이 지역에 창녕국(昌寧國)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이곳은 고타야군(古陀耶郡)으로 되었다가

경덕왕 때 고창군(古昌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태조 13년(신라 경순왕 4년, 서기 930년) 이곳 병산에서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전투를 벌였고(고창 전투), 이때 이 지역의 호족들인

김 행, 김선평(金宣平), 장정필 등이 왕건을 도와 승리로 이끌었다.

세 사람은 벼슬과 식읍을 받았는데,

김 행은 태조에게서 권씨 성(姓)을 하사받아 안동 권씨가 되고,

김선평은 안동 김씨, 장정필은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위키백과>

 

왕건은 이 전투로 ‘동쪽을 안정시켰다.’라는 의미에서

고창군의 이름을 ‘안동부(安東府)’로 바꿨다.

 

이후 고려조에서 안동은 영가군(永嘉郡), 길주(吉州), 안동부(安東府),

복주(福州),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동루-01.jpg       복원된 종루-01.jpg

                                       <대동루>                                 <복원된 종루 – 시민의 종>

 

안동에 천주교가 들어온 계기

 

안동교구는 천주교 교리에 따른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 선생을

교구 지역 신앙의 배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홍유한은 1750년부터 성호 이 익의 제자들과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등을 공부했고, 이 벽, 권철신, 정약전 등의 천진암 강학회(1780) 이전에

이미 칠극에 의한 수계생활을 시작했으며, 1775년에는 영남지방으로 내려와

순흥 고을 동쪽의 단산 구구리에서 수계에 정진한 선각자이다.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난 신자들은 소백산, 태백산, 예천 등의 산골짜기에 들어와

숨어 살면서 교우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814년에는 전국에 혹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고난이 형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교인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들의 탐욕과 지방관들의 자의(恣意)로, 중앙의 지시도 없이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乙亥迫害 1815)였다.

 

청송의 노래산(老萊山) 교우촌에서 고성운(高聖云), 고성대(高聖大), 최봉한(崔奉漢) 등

40명의 교인이 체포되어,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14명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됐다.

 

진보(眞寶)의 머루산에서는 김시우(金時佑) 등 33명이 붙잡혀 20명이 배교했고

영양에서는 김종한(金宗漢), 김희성(金稀成) 등 6명이 대구 감영으로 끌려갔다.

 

대구 감영에 갇힌 33명 중 26명은 병사하거나 옥사했고, 고성운, 고성대, 김종한, 김희성,

김화춘, 최성열(崔性悅), 이시임(李時任) 등 7명만이 살아남아

1816년 12월 19일(음 11월 1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안동의 순교 복자들

 

♱ 김시우 알렉시오(金時佑)

     - 이 연재 ‘80. 대구 경상감영 - 감옥 터 – 형장 터’에 상술.

 

♱ 복녀 이시임 안나(李時壬)

     - 연재 ‘81. 대구 계산동성당,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 상술.

 

♱ 복자 이재행 안드레아(李在行)

     - 연재 ‘81. 대구 계산동성당,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 상술.

 

♱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金稀成 1765~1816)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_김효애 작-001.jpg

   <복자 김 프란치스코 - 김효애 작>

 

김희성은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金廣玉 1741?~1801)가 그의 부친이다.

부친 순교 후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산을 예산에 버려두고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소백산맥 준령을 넘어 일월산 깊은 산골에 있는

경상도 영양 고을 곧은정(경북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 417)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김광복(金光福)을 비롯한 몇몇 신자 가족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고, 독서와 기도로 굳건한 신앙을 키워갔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배교자 전지수의 밀고로

안동 진영의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자, 그는 아들에게

남아서 가족을 잘 보살피라는 부탁을 하고, 집에 들러서는 아내에게

신앙을 지키고 자녀들을 잘 가르쳐서 장차 자기 길을 잇도록 권고한 후

포졸들을 따라나섰다.

김 프란치스코는 안동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김종한 안드레아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가톨릭 성지 목록. 예산 여사울 성지 홈페이지>

 

 

공민왕이 이름 지은 '안동웅부'에서 따 온 ‘웅부공원’

웅부공원-01.jpg     공민왕 친필 안동웅부.jpg

                                                        <웅부공원>                                          <공민왕 친필 ‘안동웅부’ -

                                                                                                    안동 민속미술관 소장>

 

 

고려 때 지금의 도청 격인 ‘안동대도호부’가 있었고

조선 조에서는 안동 감영이, 이후 안동 군청이 사용했던 건물은 1995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는 웅부공원(안동시 서동문로 193. 동부동 65-2.)이 설치됐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와서 70여 일을 머물다 간 공민왕이

안동에 대해 느끼는 듬직한 마음과 애정을 담아

‘안동웅부(安東雄府)’라는 현판을 달아준 데서 ‘웅부’의 별칭이 생겼다.

‘웅부’는 ‘웅장하게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안동대도호부의 옛터에 역사와 문화, 행정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안동웅부 관아 복원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1988년 새 건물을 착공,

2002년 준공하고, 2004년 시민공모를 통해 ‘영가헌(永嘉軒)’으로 명명했다.

경북 영양군 북쪽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半邊川)과 낙동강이 합친다는 의미의

‘영(永)’ 자와 아름다울 ‘가(嘉)’ 자로 지어진 옛 이름을 따 왔다.

 

관아 앞의 문루(門樓)에는 시민들이 대동루(大東樓)라는 이름을 주었다.

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안동에 하사한

‘안어대동(安於大東)’이 지명의 유래이다.

<Cultural Heritage Wiki>

 

 

안동 감옥 터

 

위에 소개한 네 분 복자 이외에도 많은 신자가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에 갇혀서 고통을 겪거나 순교했다.

 

 

♱ 복자 김강이 시몬 (金鋼伊 1765?~1815)

체포되는 김강이 시몬 - 탁희성 그림..jpg

                      <체포되는 김강이 시몬>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강이는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 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장성하여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했다.

 

1795년 초여름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고산을 방문하자,

김 시몬은 여러 차례 신부의 처소로 가서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했는데

이때 그의 아내는 체포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많은 돈을 쓰고 석방됐다.

 

박해가 끝난 뒤 등짐장사가 되어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만들었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시몬은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어 안동에 수감됐다.

강직한 성격의 김 시몬은 관장에게,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고,

관장이 이를 받아들이자, 되찾은 재물을 굶주리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해 5월, 김강이 시몬은 자신이 살던 강원도의 수부(首府) 원주로 이송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형벌의 상처가 아주 심한 데다가 이질에 걸려

12월 5일 병사, 원주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가톨릭 성인 목록>

<이 연재 ‘43. 원주 강원 감영’ 편에도 소개됨.>

 

 

머루산 교우촌에서는 김시우, 김강이 외에, 최윤금, 심 환, 김광억과 그의 처 분령 및

아들 종건, 김홍금과 아들 김장복, 딸 작단, 김헌동과 아들 갑득, 딸 시임, 정임 등이

안동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용감히 신앙을 증거했다고 한다.

 

 

안동 옥 터의 정확한 자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현재의 ‘옥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옥(獄)이 있었다고 하여 옥거리 또는 옥리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 때 그들이 옥동(玉洞)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이다.

좀 더 깊은 연구로 제대로 된 위치가 밝혀지기를...

<안동 옥 터 성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