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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나주 순교자 기념 경당과 무학당 순교 터

 

순교자 기념 경당-01.jpg

                                                                    <순교자 기념 경당>

 

나주 순교자 기념 경당(전남 나주시 박정길 3. 산정동 18-2. 나주성당)은

천주교 박해 시대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 베드로(1807~1839),

유문보(일명 작객 1822?~1871), 강영원 바오로(일명 성운, 1822~1872),

유치성 안드레아(일명 치경, 1825~1872),

네 분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성지이다.

<성지 홈페이지>

 

네분 순교자 가묘-01.JPG               이춘화 베드로 가묘-01.jpg

                           <네 분 순교자 가묘>                                                <이춘화 베드로 가묘>

 

이춘화 베드로(? ~ 1839)

이춘화 베드로는 나주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이른 기해박해(1839년) 때

나주 읍내 옥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해서는 달레 신부의 <조선 천주교회사>에 기록된 짧은 기록밖에 없다.

공주 태생<?년 생, 1807년생-홈페이지, 1806년생–성지의 가묘>으로

나주에 와서 산 지 얼마 안 된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신앙을 지키다가 고문으로 읍내 옥에서 순교했다.

 

 

유문보 바오로(?~1872)

<유 안드레아 -홈페이지. 유 바오로 - 하느님의 종 132위 약전.

1813년생 - 132위 약전. 1822? 년생 - 홈페이지>

 

나주 출신의 유문보는 옥구ㆍ장성 등지에 살다가

장성 내인동(현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서 입교한 뒤

박해를 피해 전라도 영광과 충청도 남포 등지를 거쳐

장성 삭별리에 정착해 신앙생활을 했다.

신미박해 때인 1871년 음력 11월 한 동료의 밀고로 잡혀서 나주로 압송됐다.

그곳 진영 옥에서 유치성 회장과 강영원을 비롯한 교우들을 만났다.

 

영장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다그쳤다.

유문보는 “국법대로 사형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소리치며 밀고하지 않았다.

화가 난 영장은 매질을 명했고, 팔이 부러진 다음에야 그쳤다.

나중에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고

진물이 흐를 정도가 됐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문보는 병에 걸려<홈페이지에는 염병으로 기록.>

1872년 3월 20일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를 부르다가 순교했다.

<하느님의 종 132위 약전. 홈페이지에는 1871년 11월쯤 50세에 옥사.>

 

유문보 바오로 가묘-01.jpg                              강영원 바오로 가묘-01.jpg

           <유문보 바오로 가묘>                                                    <강영원 바오로 가묘>

 

강영원 바오로

강영원 바오로<?∼1872-홈페이지. 1822~1872-하느님의 종 132위 약전>는

충청도 홍산 출신으로 부모에게 신앙을 물려받았다.

<132위 약전. 홈페이지에는 ‘전북 용담인’으로 기록됨.>

부모가 순교하자 전라도 용담(현 진안군 용담면)으로 이주했고,

다시 정읍 남면 이문동, 임군명 니콜라오 집에서 품을 팔며 살았다.

젊어서 아내를 잃은 뒤 재혼하지 않고 20여 년을 홀로 지냈다.

천한 일을 마다치 않았으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늘 “제 소망은 박해를 당하게 됐을 때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존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으니,

나처럼 비천한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1872년 1월 3일 여느 때와 같이 임군명의 집에 모여 기도하던 중 체포됐다.

임군명을 잡으려던 것이었는데, 강영원도 신자임을 알고 함께 체포한 것이다.

 

강영원은 짚신도 없이 맨발로 눈길을 걸어 나주로 압송되었다.

이를 본 한 포졸이 버선을 벗어 그에게 주었다.

그곳에서 유치성 안드레아 회장과 유문보 바오로를 비롯한 다른 교우들을 만나

서로 격려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견뎌냈다.

 

유문보가 병사하고 나서 유치성과 함께 훈련장이며 형장이던 무학당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은 태장 30여 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마침내 1872년 4월 16일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했다.

 

한편, 1781년 체포돼 강영원과 함께 옥살이하다 석방된 최성화와 서윤경은

강영원의 이름과 세례명을 ‘영운’ ‘성원’ ‘요셉’으로 증언해

「병인치명사적」에는 이 이름들이 함께 기록돼 있다.

<펑화신문 2020. 3. 29. 하느님의 종 132위 약전.>

 

 

유치성 안드레아

유치성 안드레아 가묘-01.jpg

         <유치성 안드레아 가묘>

 

유치성 안드레아<홈페이지- ? ∼1872. 132위 약전-1825~1872>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

두 살 되던 1827년 정해박해로 부모가 체포돼 충청도로 유배되면서

그도 충청도에서 성장했다.

장성하자 전라도 무장의 암티점(현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으로 이주했다.

 

무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1871년의 신미박해로, 다음 해 1월 2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됐다.

신문을 받으며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자

영장은 유치성의 발등을 불로 지지고 돌무더기에 묻어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

결국, 강영원과 함께 무학당으로 끌려가 태장 30여 대를 맞고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병인치명사적」의 순교자 목격 증인에 따르면 유치성이 백지사형이 아니라

매를 맞아 순교했다고 하며, 「치명일기」에는 돌로 맞아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다.

유치성의 후손 중에서 사제가 8명, 수도자가 8명 탄생했다.

 

 

나주 무학당 순교 터 성지

 

나주초교-무학당 순교 터-01.jpg       나주초교 정문-02.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이 순교터로 알려진 화단.jpg

                                   <무학당 순교 터>                                  <나주초교 정문.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이 순교 터.>

 

나주 무학당(武學堂)은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성지로

조선군 병영의 정문이었다.

병인박해 때 강영원, 유치성, 유문보 세 분이 여기에서 순교했지만,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신자가 장렬하게 목숨을 바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나주 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무학당 건물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다만 현재 나주 초교(나주시 남외1길 16. 남외동 128) 정문 안의 화단에서

무학당 건물의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 12개가 발견되어

이곳이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2001년 주춧돌 중 두 개는 남겨두고, 10개는 나주성당으로 옮겼다.

화단에는 ‘순교 터 안내판’이 세워졌다.

 

 

나주성당의 설립

 

나주성당-01.jpg         나주 성당 -01.jpg

                             <나주성당>                                                           <나주성당 성전>

 

 

나주 지역의 본격적인 전교는 1933년 5월 나주에 설립된

십팔은행(十八銀行) 지점장 임태길(任太吉 마태오)의 부인 이 루시아와

계량본당(桂良. 현 나주 노안성당 老安聖堂)의 복사

이응범 아우구스티노(李應範)에 의해서였다.

이 루시아의 공소 설립 제안에 이응범이 계량본당의 박재수 신부와 의논,

1933년 9월 임태길의 사택에 나주 공소를 개설했다.

열심한 전교 활동으로 공소 시작 당시 17명이었던 신자 수가

2년 후 100여 명으로 증가했다.

1935년 아일랜드의 골롬반 외방전교회에서 나주읍 박정리(현 성당 자리)에

3천 평의 부지를 마련, 50평 규모의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여

본당이 설정되었다.

 

 

순교자 기념 경당 건립과 성지화

 

무학당 터 기념 조형물-01. 무학당 주춧돌 위에 건립.jpg          순교자 기념경당 성전-01.jpg

  <무학당 기념 조형물 - 무학당 주춧돌 위에 건립>                                             <순교자 기념 경당 성전>

 

무학당에서 1Km 떨어진 나주 본당은 설립 70주년을 맞아

성역화를 시작, 2001년 나주 초교 내의 무학당 순교 터에서 발굴한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의 돌 중 10개를 성당으로 옮겨와

8개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우고

두 개는 14처 입구에 설치해 놓았다.

 

이어 2004년 본당 내에 ‘빈 무덤’ 형태의 순교자 기념 경당을 건립하고,

1934년 7월 나주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인 사제관을 수리해

초대 본당 신부 ‘하롤드 현’ 대주교 기념관으로 개관했으며,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으로 쓰였던 한옥 기와집도 복원했다.

2011년 5월 17일에는 네 분 순교자 현양을 위해 무학당 터 흙을 취토하여

현 대주교 기념관 맞은편 쉼터 대지에 순교자 묘원을 조성하였다.

 

 

현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

 

현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01.jpg           현 하롤드대주교-02.jpg

                              <현 대주교 기념관>                                                        <하롤드 현 대주교>

 

성당 왼쪽 언덕 위의 고풍스러운 단층 적벽돌 건물이 현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이다.

1935년 나주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하롤드 대주교는

이곳에서 7년간 사목하면서 성당 안에 해성 학교를 설립,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우리말,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현 대주교(Harold Henry)는 1909년 7월 11일 미국 미네소타주 노드필드에서 태어나

1932년 12원 21일 성 골룸반 선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1976년 3월 1일 제주에서 서거하기까지 43년간 신부와 교구장으로서

순교 영성을 몸소 실천한 사제이다.

현 대주교는 여러 본당 주임을 역임하면서

남녀 수도회를 초청하여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교육, 의료, 복지 관련 사업들을 벌여 사회를 구제하고

천주교 발전의 토양을 마련한 고마운 분이시다.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

까리타스 수녀회 본원-01.jpg          까리타스 수녀회 성모동산-01.jpg

                      <까리따스 수녀회 첫 본원>                                                  <까리따스 수녀회 성모동산>

 

경당 앞 대나무밭과 토담 길을 따라 내려가면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이었던 한옥 기와집이 복원돼 있다.

원 건물은 1934년에 건립돼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본원으로 쓰였다.

1959년 본원은 광주로 옮겨갔다.

 

1926년 2월 8일 살레시오회 선교사로서 일본에 파견된

수도 사제 안토니오 카볼리(Antonio Caboli) 신부는

미야자키시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젊은 여성들을 모아

‘애덕자매회’를 만들어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꾸준한 활동으로 규모를 늘려 수녀회를 설립하였고,

1937년 8월 15일 미야자키 까리따스 수녀회로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1956년 광주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몬시뇰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하여 나주성당에 자리 잡았다.

이때 파견된 수녀들은 일본에서 입회한 한국인들이었다.

 

현재 한국 까리따스 수녀회에는 각 교구에서 본당 사목을 담당하며,

파푸아뉴기니에서 해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오스트리아와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활발히 하고,

이 밖에도 교육, 사회사업, 출판 사업 등에 전념하고 있다.

 

 

나주 순교 성지들을 돌아보면서, 이 글 여러곳에서 주석을 붙였듯이,

자료의 부족과 부정확함을 너무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전혀 밝혀지지 않은, 순교와 순교자들의 역사를 찾아내는 일이 시급하며

그나마 알려진 오직 네 분에 대해서도, 폭넓은 고증을 통하여

서로 다른 기록들을 한 데로 바로잡는 노력이

외적인 성역화에 우선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구달 2022.08.27 14:07
    고맙게 보고 갑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