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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배교(背敎)와 신앙이 점철(點綴)된 정약용의 다산초당

 

다산초당-001.jpg

                                                            <다산초당>

 

1770년대 후반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고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783년,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고향 양근(楊根)에서 서울로 가는 배 안에서

한국 천주교의 비조(鼻祖) 이 벽(李 檗)과 천주교를 주제로 토론했고

1784년, 수표교 이 벽의 집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 - 천주교를 배척함)의 태도를 보인다.

<1785년(정조 9) 3월,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 집회가 적발된 사건.

  집회 장소인 김범우의 집이 명례방(明禮坊 현 서울의 명동)이어서

  명례방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정약용-01-01.jpg           정약용-02-01. 다산초당 안에 있는 초상화..jpg

              <정약용 초상 - 01>                                    <다산초당에 모셔진 정약용>

 

그러나 1787년 정미반회사(丁未泮會事) 사건을 보면

장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이

처남 정약용, 강이원(姜履元) 등과 함께 성균관 앞의 반촌(泮村)에서

천주교를 강습했다가 들켜, 정조에게까지 보고된 사건이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죽임을 당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게 일어나자

그는 다시 분명하게 배교하는 자세를 밝혔다.

 

이어 1797년 다시 서학도(西學徒 - 천주교도)로 지목받자

그는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 - 죄가 없음을 변명하는 상소)를 올려

이와 같은 비난을 반박했다.

 

그리고 1799년에는 ‘척사방략’(斥邪方略)을 저술했다.

정학(正學)인 성리학(性理學) 이외의 사상,

즉 천주교 등 사학(邪學)을 물리치는 방법을 서술한 책이다.

 

전역용-03-01. 정약용 표준 영정-생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됨.jpg                                 -01.jpg

<정약용 표준 영정, 생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          <표준 영정-02. 표준 영정이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지정한 영정을 말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정약용의 셋째 형 약종(若鍾)과   

그의 아들 철상(哲祥), 자형 이승훈, 이존창(李存昌), 주문모 신부 등이

참수되고, 권철신이 옥사하는 등 50여 명이 순교했다.

 

정약용도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임을 부인하고,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 조동섬(趙東暹), 황사영 등을 고발했고,

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學童)을 신문하여

정보를 밝히도록 제안해서 이것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가톨릭 사전>   

 

                                                        <정약용 가계도>

정약용_가계도.jpg

 

그는 1801년 장기(長鬐 - 경북 포항 지역의 옛 지명)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신문을 받고 강진으로 옮겨졌다.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을 얻어(강진읍 동성리. 현 군청 근처) 4년간 살았는데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선비라면 사의담(思宜澹 담백한 생각), 모의장(貌宜莊 장엄한 용모),

언의인(言宜認 과묵한 언어), 동의중(動宜重 신중한 행동)의

네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의재-01.jpg       주막집 모녀상 - 사의재-01.jpg

                                 <사의재>                                                  <주막집 모녀상 - 사의재>

 

1813년에 낳은 딸 홍임(紅任)의 생모가 이 주모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홍임 모녀는, 유배가 풀리자 정약용과 함께 본가인 마재로 왔으나

부인 홍혜완이 받아주지 않아 강진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두 모녀의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약용은 1808년 봄 모친의 친척 윤 단(尹 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草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를 쓴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자가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고

그 손녀가 정약용의 모친 해남 윤씨이며, 윤 단은 공재의 조카뻘이다.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 단의 아들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그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정약용은 유배 18년(1801~1818) 중 11년(1808~1818)을 이 초당에서 보냈다.

만덕산(萬德山) 중턱의 초당 주위에는 차나무가 무성하여

정약용은 찻잎을 끓여 마시기를 즐겼고, 이에 다산(茶山)이라는 호가 비롯됐다.

다산은 여기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지었다.

윤 단이 수집한 장서 1천여권과, 외가인 해남 윤씨 종가가 있는

해남 ‘녹우당’에 소장된 '만권당'의 서적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산초당과 그 앞의 다조(茶竈)-01. 다조'는 차 끓이던 부뚜막 바윗돌로 초당 앞마당에 놓인 평평한 바위를 가리킨다.jpg

                 <다산초당과 그 앞에 있는 다조(茶竈). 다조는 차를 끓이던 부뚜막 바윗돌로

                   초당 앞마당에 있는 평평한 바위를 가리킨다.>

 

 

다산은 산정에 연못을 파고 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여 폭포(飛瀑)를 만들었다.

주위에는 각종 꽃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석가산을 꾸몄다.

그는 시 ‘만춘’에 "매화나무 아래에 우거져 있는 잡초를 베어내고

차례로 단을 쌓아 9급의 채포(菜圃)를 만들고

새롭게 꾸민 화오에는 이름난 꽃과 아름다운 초목을 심었다"고 썼다.

다산은 원포(園圃)를 이야기하면서 "진귀한 과일나무를 심은 곳을 원(園)이라 하고,

맛 좋은 채소를 심은 곳을 포(圃)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다산초당이 만들어졌고,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명의 제자가 유명하였는데, 윤규로의 막내아들 윤종진(尹鍾軫 1803~1879)은

여섯 살에 초당 강학의 끝자리에 끼어 앉아 형들과 함께 공부했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그에게 ‘작은 거인’이 되라는 뜻에서

순암(淳菴)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순암호설(淳菴號說)’ 등 몇 편의 친필을 써주었다.

 

윤종진 묘소-01.jpg

              <윤종진 묘소 - 초당 오르는 길 가에 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자

순암은 18인 제자들과 다신계를 조직해 평생 차를 만들어 스승에게 보냈다.

이 차는 금릉다산향(金陵-강진의 옛 이름. 茶山香)이라고 불렸다.

 

윤종진은 1867년 진사가 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와 1869년 국가 위기에

의병을 모아 참여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했다.

<역사 마당>

 

강진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산은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한다.

<다산초당 홈페이지>

'여유(輿猶)‘는 ’노자(老子)‘에 나오는 말이다.

 

與兮若冬涉川 여혜약동섭천 : 망설임이여,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하고

猶兮若畏四隣 유혜약외사린 : 경계함이여,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한다.

(노자 15장)

 

여(與, 豫라고도 함)와 유(猶)는 원래 짐승 이름인데, 의심과 겁이 많아,

소리만 나면 나무 위에 올라가 숨는 짐승이라고 한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자면 얼어붙을 듯 차가운 물이 겁나고,

사방에서 자신을 엿보는 것을 알면 그 적대적인 시선이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두렵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여와 유라는 글자를 당호로 삼았으니,

그가 이 세상을 살얼음판 걷듯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려서는 일찍이 세속을 초월함(方外 - 방외 ; 천주교를 가리킴)에 치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 돌아보지 않았으며,

 서른 살이 넘어서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를 깊이 진술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을 좋아하여 싫어할 줄을 몰랐으나 홀로 비방을 많이 받았다.

 아! 이 또한 운명인가? 성품이 이에 있으니 어찌 감히 운명이라 말하겠는가?”

<奧猶堂記 - 여유당기>

 

정약종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의 ‘여유당’이라는 자호(自號)로써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성지/사적지 목록 – 다산초당>

 

                       다산 박물관의 동상과 그가 초당  뒤 바위에 새겨놓은 글씨 '정석'-01.jpg

            <다산과  ‘丁石 - 정석 ’.  다산박물관 앞에 세워진 동상과

               그가 초당 뒤 바위에 새겨놓은 글씨>

 

1818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 정 요한은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하고

자주 대재(大齋 : 금식 금육재 禁食 禁肉)를 지켰으며

세상과 떨어져 고신극기(古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고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전한다.

 

또한 이 시기에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하여,

다블뤼(Daveluy) 주교가 ‘조선천주교회사’ 저술을 위한 자료 수집 때

초기 교회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초기 부분에 상당 분량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 원본은 1863년 주교 댁 화재 때에 소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가톨릭 사전>

 

 

정 요한은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마재 자택에서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했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이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원래 목조 초가였는데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되어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목조 와가(瓦家-기와집)로 중건했다.

<강진군청-다산 초당. 성지목록에는 1958년으로 기록돼 있다.>

중앙의 다산초당은 다산의 침소(寢所 - 잠을 자는 곳. 살림채) 이다.

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였는데, 지금의 현판 글씨는

추사의 글자들에서 모아 새긴 것(모각 模刻)이다.

24세 연하의 추사는 다산을 스승으로 존경했다.

 

초당 동쪽(초당을 보며 오른 쪽)에는 연지석가산이 있다.

원래 있던 연못(蓮池)을 넓히고, 바닷가에서 돌을 날라와

석가산(石假山-신선들의 정원)을 만들었다.

 

다산초당과 -연지 석가산-01.jpg

                   <다산초당과 연지 석가산>

 

서암

초당 서편의 서암(西庵)은 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 늦도록 탐구한다는 뜻의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한다.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재축했다.

 

                                          서암-01-추사 글씨인'다성각' 현판이 걸려있다.jpg

                                     <서암. 추사가 쓴 '다성각'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의 동암(東庵)

동암(東庵)은 다산이 거처하던 건물로,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렸으며,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저술작업을 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1976년 복원했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 모각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송풍루’는 다산이 찾아 온 지인을 맞이하며 읊었던 시

‘四時笙瑟松風響 - 사시생슬송풍향 : 소나무 바람 소리 피리이자 거문고’에서 따온 것.

추사가 쓴 ‘보정산방’은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

 

동암-02-01.jpg

             <'보정산방', '다산동암'의 현판이 걸린 동암.>

 

다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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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박물관>

 

다산초당 남쪽 700m 지점에 있으며, 2014년 7월 26일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됐다.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박물관 정면 넓은 광장에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라 명명된

‘말씀 정원’ 과 ‘다산 정원’이 조성되었다.

‘말씀의 정원’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을 비롯하여

다양하고도 많은 선생의 말씀을 새겨 놓은 돌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말씀 정원.jpg          다산과 제자들 -01-다산 박물관.jpg

                                 <말씀 정원>                                                  <다산과 제자들>

 

박물관 안에는 다산의 경력과 저술에 대한 많은 자료가

실물로, 또는 그림 등으로 전시돼 있다.

특히, 경학에서 출발하여 경세학으로 체계화된 방대한 저술은

유배 때 길러낸 제자들이 참여, 분업화된 작업의 결과였다고 하여

스승과 제자들에 대한 사료들도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다산과 함께-01.jpg

                                                        <다산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