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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정해(丁亥)박해의 진원지 곡성(谷成)

곡성 성당-01.jpg

                                          <곡성 성당>

 

1815년 을해(乙亥)박해로 경상도 청송(靑松) 진보(眞寶) 영양(英陽),

강원도 원주에서 1백여 명이 체포되어 30여 명이 순교했다.

이 교우촌들의 체포되지 않은 신자들도 재산을 약탈당하고 쫓겨 다녔는데,

그중 일부가 전라도 곡성군 오곡면(梧谷面) 미산리(彌山里)와

승법리(承法里)로 피신해 교우촌을 이루고,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덕실현(현 승법리)의 옹기점에 전 아무개라는 신입 교우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주막을 차려 놓았는데.

1827년(순조 27년) 정해년 2월에 옹기 가마 하나를 증축,

처음으로 그릇을 꺼내게 되어 축하연을 베풀었다.

 

이 마을에 이름 있는 순교자 한 토마스가 살았는데 그의 아들 백겸은

성질이 광포하고 술주정이 심해서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는 이날 술에 취해 자기 술그릇이 작다는 등 주모에게 시비를 걸다가

급기야는 욕을 퍼부으며 마구 때렸다.

이를 본 집 주인 전 씨는 화가 치밀어 복수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을 들고 곡성읍으로 뛰어가 현감에게

한백겸과,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을 교우 책임자라고 고발했다.

정해박해 진원지 당고개.jpg               승법리 정해박해 진원지 표지석.jpg

                     <정해박해 진원지 당고개>                              <승법리 정해박해 진원지 표지석>

 

 

증거를 잡은 현감은 즉시 포졸을 풀어 교우촌이 있는 당고개를 포위,

신자들을 잡아들여 심한 고문을 가하고, 이를 전라 감사에게 보고했다.

감사는 박해를 순창, 용담, 임실, 장성,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4월 22일 전주의 포졸들이 경상도 상주에서 신태보(愼太甫)를 붙잡아

전주로 압송해가자, 경상도에서도 천주교인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에 이경언(李景彦)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는,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유성태(劉性泰) 집에 숨어 있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충주 감영에 수감되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로 시작된 정해박해는 조정의 태도가 완화됨에 따라

넉 달 만에 누그러졌지만 신자들에대한 추궁은 얼마나 혹독하고 광범위했던지

전라도ㆍ경상도ㆍ서울ㆍ충청도 등지에서 5백여 명이 체포되었고

전주 감옥의 240여 명을 비롯, 전라도의 모든 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전라 감사 이광문은 추위 더위와 굶주림에 약한 나약성을 교묘히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 대부분을 배교시켜 석방하거나 유배 보내어,

목숨을 바친 순교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주에서 이경언이, 대구에서 박경화와 김세박(1828)이 순교했고,

1827년에 체포되었던 김대권, 신태보, 이일언, 이태권, 정태봉은 전주에,

김사건, 박사의, 이재행 등은 대구 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에 처형되었다.

이 옥사로 전라도 지역 교우촌은 초토화되어 거의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다.

<곡성 당고개와 가마 터 성지 홈페이지>

 

 

복자품에 오른 순교자들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이 연재 ‘68. 전주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성지’ 2022. 6. 26. 에 소개>

복자 김사건 안드레아_김효애 작.jpg                   복자 김세박 암브로시오_김효애 작.jpg

      <복자 김사건 안드레아 - 김효애 작>                    <복자 김세박 암브로시오 - 김효애 작>

 

김사건(金思健 1794-1839) 안드레아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 타대오가 그의 아버지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 시몬은 그의 큰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유배를 간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로 이주하여.

기도와 전교, 성경 읽기에 열심하며 교리 실천에 노력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며칠 뒤 대구로 압송되어 1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김세박(金世博 1761-1828) 암브로시오

1761년 한양의 역관 집에서 태어나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신앙을 받아들였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가 그의 먼 친척이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얻은 그는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즐겼고, 어떠한 경우에도 밤중 기도를 잊지 않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시작되자 안동 관아로 가서 신자임을 자백했다.

한 달 뒤 대구로 이송되어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과

옥살이를 함께 했으나, 형벌과 금식재로 쇠약해진 몸이 견디지 못 해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 병사하고 말았다.

복자 박경화 바오로_탁희성 작.jpg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_탁희성 작.jpg

           <복자 박경화 바오로 - 탁희성 작>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 - 탁희성 작>

 

 

박경화 바오로(1757∼1827), 박사의(朴士儀 1792∼1839) 안드레아 부자

홍주현(현 충남 홍성군)의 양반 출신 박경화 박사의 부자는,

아버지는 정해박해 때, 아들은 기해박해 때 각각 순교했다.

 

30세 무렵에 부모를 여의고 신앙을 받아들인 박경화는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1794년 체포됐으나 형벌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그의 신앙적 열성을 배가시켜, 이후 철저히 신자 본분을 지켰고,

자유로이 신앙 생활을 하고자 산중으로 이사하기까지 했다.

아들 박사의 또한 나이가 들수록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지극한 효성으로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박경화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으며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썼다.

특히 자녀들이 열심히 신앙적 덕행을 닦도록 모범을 보였다.

60세를 넘기자 그의 가족은 충청도 단양 가마기(현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1∼5길)로

이주,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상주(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길 일대)로

옮겨 살다가, 그해 4월 말 주님 승천 대축일 행사에서 체포됐다.

 

박경화는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다른 교우들보다 훨씬 많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늙은 자신보다 다른 교우들을 보살피는 데 힘썼다.

상주 관장은 그와 그의 자식들 모두를 대구 감영으로 보냈으나

장남 박사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71세 고령의 박경화는 거듭되는 형벌에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옥사했다.

 

아들 박사의는 고령의 아버지를 보살피고자 함께 형벌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

허락을 받은 뒤 아버지를 돌보며 옥살이를 견뎌냈다.

박사의와 그의 동료들은 12년간 대구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 5월 26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이 연재 ‘68. 전주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성지’ 2022. 6. 26. 에 소개>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_김효애 작.jpg                 복자 이경언 바오로_탁희성 작.jpg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 - 김효애 작>                         <복자 이경언 바오로 - 탁희성 작>

 

 

안군심 리카르도(1774~1835)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은 청년 시절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

생계를 위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며 살았다.

본디 명랑한데다가 겸손하고 친절했던 안 리카르도는

누구나 애덕으로 대했고,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을 즐거워했다.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고, 일주일에 세 번씩 금식재를 지켰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숨어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상주 관장이 ‘국법을 어김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자

“천주는 우주의 큰 임금이고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우리는 그분을 만물 위에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님과 관장님과 부모님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구로 이송된 안 리카르도는 혹독한 형벌로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천주에 대한 사랑은 더욱 열렬해지기만 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는 옥에서 동료들을 만나 함께 8년 동안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이경언(李景彦 1792-1827) 바오로

이경언은, 이 연재 ‘66. 초남이성지 - 2022. 4. 25.’에 소개된

최초의 동정 부부 이순이 루갈다의 남동생이다.

이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했다.

몸은 허약했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했다.

 

신유박해 이듬해인 1802년에 형 이경도 가를로와 누나가 순교한 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바오로는 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살면서 가난을 신앙으로 이겨 내고,

22세에 중인 집안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학식과 재주로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북경을 오가는 밀사들의 경비 마련에 힘썼으며,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바오로는 한양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취조를 받은 뒤 전주로 이송되었다.

선천적으로 약했던 이경언 바오로의 육체는 형옥(刑獄)의 고통을 못 이겨,

1827년 6월 27일(음력 윤 5월 4일) 전주 옥에서 하느님께 육체와 영혼을 바쳤다.

 

 

이일언(李日彦) 욥

<이 연재 ‘68. 전주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성지’ 2022. 6. 26. 에 소개>

옥터성지.jpg           곡성 성당 성전-01.jpg

                                       <옥터성지>                                                      <곡성 성당 성전>

 

 

이재행(李在行 1776-1839)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했으나,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안드레아는 가족을 모아 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면서 격려했다.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살고 있을 때

포졸들에게 붙잡혀 안동으로 끌려갔다.

 

안동 관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그가 꿋꿋한 목소리로 거부하자, 대구로 이송했다.

이 안드레아는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임금은 이재행과, 함께 갇혀있던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의 사형을 윤허했다.

그들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태권(李太權) 베드로

<본 연재 ‘68. 전주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성지’ 2022. 6. 26. 에 소개함.>

 

 

정태봉(鄭太奉) 바오로

<본 연재 ‘68. 전주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성지’ 2022. 6. 26. 에 소개함>

 

윗분들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차

한국을 사목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다.

124위 복자들의 축일은 5월 29일, 모두 한 날이다.

 

 

그 외에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

곡성 성당 성모동산.JPG

                                                  <성모 동산>

 

 

김도명 김사흥 김성집 김순옥 김지성 신아지 유흥순

이도원 이성삼 이유정 이유진

<곡성 당고개와 가마 터 성지 홈페이지>

 

이분들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밝혀졌는지,

그들의 행적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 했다.

죄송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그들에 대한 기록이 빛을 보기를 기대한다.

곡성 성당 내 감옥.JPG

                                                                     <복원된 곡성 감옥>

 

 

정해박해 진원지 옥터성지 - 곡성 성당

정해박해 때 이곳 곡성 성당은 객사가 있던 곳이며,

그 앞으로는 남원진관(南原鎭管 종3품 첨절제사가 그 관장임)에 속한

종6품의 절제도위(節制都尉 조선 시대, 절도사 관할의 모든 진에 둔

종육품 벼슬. 곡성 현감이 겸임했을 가능성이 있음)가 지휘하는

좌·우의 군관청(軍官廳 일명 장청 將廳)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고개 주모 사건(酒母)으로 수많은 교우들이 잡혀 와 옥고를 치른 곳이다.

동헌 자리는 지금 경찰서가, 사창(司倉 지방향리관청의 한 부서) 있던 곳에는

군청이 자리 잡고 있다.

 

 

정해박해 후 130년이 지난 1957년, 천주교 광주교구장 하롤드 헨리 주교는

<이 연재 ‘70. 나주 순교자 기념 경당과 무학당 순교 터’에 소개됨>

선조 신앙인들의 피 흘린 터전인 박해의 진원지 곡성에 본당을 설립키로 하고

허 미카엘 신부를 파견, 신자 수는 10여 명에 불과했지만

박해 당시 감옥이었던 자리에 제대를 봉헌하고

1958년 10월 6일 마침내 곡성성당을 창립했다.

2008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옥터성지의 개발에 착수,

지금까지 확장 공사 중에 있다.

소재지 : 전남 곡성군 곡성읍 읍내11길 20 (읍내리 425-1)

 

‘곡성 당고개와 가마 터 성지’는 아직 성역화 초기에 머물러 있다.

전남 곡성군 오곡면 승법리 310-4

곡성 성당 (2).JPG

                                                                              <곡성 성당>

 

 

  • 구달 2022.12.02 02:31
    마정,
    이번에는 전라도 곡성 지역을 다녀오셨군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직 일을 찾아 먼 길을 다닐 수 있으니 축복입니다.
    건투하십시오.
    저희는 곧 동부 보스턴지역으로 먼 길 이사를 할 예정입니다.
  • 마정 2022.12.02 10:16
    고맙습니다. 열심히 계속하겠습니다. 보스턴은 추운 데 아닌가요?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