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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 - 괴산 연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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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성당>

 

서울에서 충주와 수안보 온천을 지나 30여 리를 가면 만나는 곳이

충청도 연풍(延豊)이고, 새들도 쉬어 가며 넘는다는 새재(鳥嶺)의

조령, 조곡(鳥谷), 주흘(主屹) 세 관문을 지나면 경상도 문경에 이른다.

 

새재 서쪽 기슭의 연풍은 전체가 소백산맥 산릉에 속한 험지여서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선 신앙 선조들에 의해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을해박해 때 순교한 김흥금이 1801년에 입교했는데

연풍 교우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00년 이전에 이미 연풍에 교우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교구 괴산 연풍 성지 홈페이지>

 

1801년 입교한 김병숙(1755-1815)이 신앙을 위해

연풍 교우촌으로 이주해 와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성인 황석두 루까’ - 張河多 2014.>

 

연풍은 또한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여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경상도 지역 순방을 위해 자주 넘나들던 경유지가 되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 13년간의 각고 끝에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그로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운 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병으로 선종하여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안장되었다.

 

 

연풍에서 태어나고 죽어서 연풍에 묻힌 황석두 루카 성인(1813~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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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두 루카 성인 상 >                                       <황 루카 성인 - 대성전 >

 

연풍은 1866년 병인박해 때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다.

<집옥재 2017.02.23 ‘6. 신리 성지 - 2 천주교 3대 요람과 다섯 성인’,

   2018. 03.18. ‘19. 다섯 성인과 5백여 순교자가 치명한 갈매못 성지’에

   일부 소개되었음.’>

황석두 루카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5세에 결혼하고, 스물에 과거 보러 상경하던 중<성지 목록, 성인목록 등.

주평국 저 ‘하늘에서 땅 끝까지’, 가톨릭출판사 1996 에는 25세로 기록됨.>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속세의 과거를 포기, 귀가했다.

화가 난 부친은 작두를 마당 한 가운데 놓고 아들의 목을 걸게 하였지만

황석두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눈물을 흘리며 그만 두었다.

이후 황 루카는 가족을 입교시키려고 벙어리처럼 말없이 살았고,

마침내 3년이 지나 가족 모두를 신자로 만들고 말았다.

 

뛰어난 덕행과 교리 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학식 높고 신앙 깊은 그에게,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 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갈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다섯 성인과 반석 - 01.jpg

 <다섯 성인과 반석. 오기선 신부가 발견한 반석 실물은 절두산성지에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가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자, 황 루카는 그들을 몇 십리나 따라가 함께 체포되었다.

 

관장이 문초하자 그는 ‘충효는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 제일이요,

임금과 부모께 대한 것은 그 다음일 뿐입니다.

세속 일에서도 친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고발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한 형제인 교우들을 고발하고 교회 일을 발설하겠습니까?

관장께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도리입니까?

1866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널리 편 것은

어느 성인도 가르칠 수 없는 진리이니,

어찌 그 가르침을 배반하겠습니까?’ 라며 교회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다.

<[우포도청 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공초>

 

황 루카와 다블뤼 주교, 위앵 민(閔) 신부, 오메트르 오(吳) 신부,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1866)은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닷새를 걸어 충남 보령 갈매못에 도착, 3월 30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황 루카 성인 묘소-01.jpg             노기남 대주교 - 01.jpg

                                   <황 루카 성인 묘소>                                           <노기남 대주교 동상>

 

순교자들의 시신은 나흘 동안 형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중 황석두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고향 선산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순교자들은 홍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882년에 발굴되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00여 년이 지나 연풍 성지 개발이 시작되자 1979년,

연풍의 평해 황씨 선산에 안장되어 있던 황 루카의 무덤을 발굴,

성인의 유해를 확인한 후, 다음 해에 임시로 수안보 본당에 안치했다가

1982년 8월 25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성지/사적지 목록>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순교자 ‘하느님의 종’김흥금(金興金 1765~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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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외 성전 - 02>                                         <연풍성지 성모동산>

 

김흥금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나,

너무 가난한 탓에 1801년 고향을 떠나 연풍의 교우촌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해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체포되자

가족과 함께 경상도 진보(眞寶) 땅으로 피신했다.

여기에서 아내를 잃은 그는 19세 된 아들 장복(長福)과 딸 작단(作丹)을 데리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가난한 가운데서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했으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언제나 앞장섰다.

 

그러던 중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부활 축일을 지낸 뒤 며칠 만에

아버지와 아들 딸, 김시우 이시임 등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안동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안동 진영에서의 혹형을 못 이긴 딸 작단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그와 아들은 꿋꿋이 형벌을 견뎌낸 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2월 26일 감옥에서 병사했다.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하느님의 종’ 이란...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종', '가경자', '복자 '의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하느님의 종’이란, 시복(諡福) 조사가 시작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조사가 교황청에 정식으로 접수되면 가경자(可敬者)가 된다.

현재 우리나라 가톨릭에는 133위의 ‘하느님의 종’이 있다.

 

 

연풍성지의 개발

 

향청 - 01.jpg

                                                   <향청>

 

연풍성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을 사들이면서 부터이다.

교회사학의 권위 오기선 요셉(吳基先 1907-1990년) 신부와,

미국 부모로부터 사재를 가져다가 형방 건물과 성지 부지를 매입,

연풍성지의 주추를 놓고, 30년간의 수안보 성당 주임에 이어

1992년 연풍성당 초대 담임으로 부임하여 2004년 은퇴할 때까지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친 정안빈(Robert M. Lilly) 신부의 공로가 크다.

 

3백년이나 묵은 건물을 매입할 때는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매입 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사용된 형구돌이

1964년, 1972년, 1992년 각 1개씩 3개나 발견됨으로서

이 부지가 치명터(사형장)임이 밝혀진 것이다.

처음으로 발견된 형구돌은 1974년 절두산 성지로 이전되었고

나머지 두 개는 성지에 서 있다.

형구돌-01 - 01.jpg                     형구돌-02 - 01.jpg

                     <형구돌 - 02>                                                  <형구돌 - 03>

               <목에 밧줄을 건 신자를 구멍 앞에 세우고, 반대편 구멍에서 잡아당겼다.>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었다.

공소로 사용하던 향청 건물을 복원하고 기념관을 마련했으며,

2005년 9월 24일에는 중앙 제단과 성모상 축복식을 거행했다.

2013년 3월 9일 황 루카 성인 탄생 200주년 기념 성당 기공식을 갖고

1년 6개월만인 2014년 9월 20일 완공, 봉헌식을 올렸다.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 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44년간 한국에서 헌신한 정안빈 신부(1828~2016)

정안빈 신부- 01 금경축 - 2010 - 01.jpg                            정안빈 신부- 02.jpg 

                     <정안빈 신부 금경축 - 2010.>                                         <정안빈 신부>

 

정안빈(Robert. M Lilly) 신부는 192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출생,

1954년 메리놀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며 1960년 한국에 입국,

충주 교현동본당 보좌, 1962년부터 30년간 수안보본당 주임을 역임했다.

한국의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에 깊은 존경심을 가졌던 그는

오기선 요셉 신부(吳基先 1907. 11. 5. ~ 1990. 7. 30.)를

아버지로 모시고 1968년부터 연풍성지 개발에 착수,

형구돌 발견으로 치명터를 확인하고, 황석두 루카 성인 묘를 발굴,

1982년 성지로 이장했으며 대형십자가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모후 상,

황석두 성인 동상 건립, 소성당과 성지회관 건축 등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쳤다.

 

2004년 은퇴했고 2016년 7월 암이 발병, 9월부터 뉴욕 메리놀병원에서 투병 중

12월 21일 선종했다.

 

 

아시아 전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 메리놀 전교회

메리놀회(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는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최초의 외방전교회로, 1911년 6월 29일

월시(J. A. Walsh) 신부와 프라이스(T. F. Price) 신부가

아시아 지역 전교를 목적으로 설립했다.

1916년 월시 신부가 내한하여 뮈텔 주교를 만나자,

파리 외방전교회는 평안도 지방의 관할권을 내주었다.

1950년대부터 청주를 중심으로 포교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인천교구를 담당했다.

현재 병원 사목, 구라회, 아동 교육, 사회사업 등

메리놀회 선교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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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성당 -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