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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최양업 신부의 사목 거점, 배티성지

 

 배티성지 최양업 기념 성당 -01.jpg

                                                              <배티성지 성당>

 

배티성지(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양백리 471)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두 번째 사제가 된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포교와 사제직 수행의 본거지로 삼았던

배티에 조성한 뜻 깊은 성지이다.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하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49년 12월 3일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여러 곳에 숨어있는 교우들을 찾아서,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 여 리를 걸어 다니며

신자 3,815명을 만났고,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배티성지 홈페이지에는, 1850년에서 1851년까지 8개월 동안

127개의 교우촌을 순방하고 5,936명의 신자들을 만났다고 기록 됨.>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Daveluy 安敦伊 1818~1866. 1857년 주교),

프티니콜라 미카엘 신부(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등이

1850년대 초부터 배티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하였고,

메스트르 요셉(Maistre 1753~1821), 페롱 스타니슬라오(Feron 權 1827~1903),

칼레 아돌프(Calais 姜 1833~1884) 등 프랑스 선교사들도 사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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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옛 성당>

 

쉬지 않고 계속되는 과다한 성무로 휴가를 받아야만 했던 최 신부는

진천의 절골(백곡면 용덕리) 교우촌에 우선 거처를 정하고,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절골을 택한 이유는, 주변에 이미 여러 개의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고,

그 이웃 동골에 그의 셋째 동생 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티성지 홈페이지>

 

최 신부의 부친 최경환 성인과 모친 이성례 복녀가 1839년 순교하자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셋째 아우 우정(崔禹鼎 바시리오)은 동골 친척 집에 맡겨졌고

이곳에서 자라 뿌리를 내리고 가족을 이루어 자리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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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성당 터에 세운 최경환 성인 최양업 가경자 이성례 복녀>

 

최 신부는 3년 후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매년 10월경부터 이듬해 6월 무렵까지 약 8개월 동안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충청, 경상,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을 순방,

걸어 다닌 거리가 매년 5,000리 내지 7,000리에 달했다.

여름에는 배티로 돌아와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행하거나

사목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했다.

 

 

1850년경 다블뤼 신부는 경기도 용인 손골(여름철)과 한 쌍을 이뤄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이동형 소신학교(겨울철)를 이곳에 설립했고,

1851년 11월 정주형(붙박이)으로 바꾸었다.

1853년 여름부터 최양업 신부가 이어받아 신학생들을 키워 내

1854년 봄 이만돌 바울리노, 김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을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최양업 신부는 전국의 교우촌을 찾아 매일 수십 리를 걸었으며,

때로는 신자 한두 집을 방문하려고 인적 드문 골짜기를 올라갔다.

어느 겨울에는 밀고 때문에 신자 집에서 쫓겨나 맨발로 산야를 헤맸는가하면

포졸들과 비교도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 삶이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1846-1847년 서한 중에서)

 

 옛 성당 터의 최양업 신부-01.jpg

                              <옛 성당 터의 최양업 신부>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년 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다가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문경에서 선종했다.

시신은 문경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신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토마스는 ‘붉은 피를 흘리지 않은’ ‘백색 순교자'가 되었고

‘땀의 증거자’로 불리게 되었다.

<가톨릭 성지 목록>

 

 

배티의 교우촌과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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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 마을>

 

배티 순교성지는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태안반도 지령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서운산(瑞雲山 547m)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예로부터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인 데다가

충청 좌도와 우도, 경기도의 접경에 위치해 있어

박해를 피해야 했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금북정맥 : 한반도 13정맥 중 하나.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시작된 한남금북정맥이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금북과 한남으로 갈라졌고, 칠장산으로부터

태안반도 지령산(知靈山)에 이르는 약 240km의 금북정맥을 이루었다.

‘금북정맥’이란 금강의 북측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

 

배티 일대로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이며,

계속되는 박해로 순교한 남인 양반들의 가족과 일반 신도들이 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까지 배티 일대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고개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 고개라고 불리다가

한자로 이치(梨峙)로 표기했고, 배티라는 지명으로 정착되었다.

 

배티 산곡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30년 무렵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의 셋째 아우 우정이 1839년 동골 친척 집에 맡겨졌으니

그 이전에 이미 교우촌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1837년 5월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배티에서 성사를 주었고, 이후 배티 교우촌은 충청도 최초의 공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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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성당 야외 성전>

 

박해가 이어지고 많은 신자들이 체포됨으로써 교우촌들은 와해되고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졌으나, 박해가 끝나가는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이 다시 이곳에 모여 교우촌을 재건했다.

1888년 충청도를 전담하게 된 두세 가밀로 신부(Doucet 丁加彌 1853~1917)가

배티 공소를 설립했고, 1892년에는 새울과 용진골,

1893년에는 삼박골에 공소가 설정되었다.

이후 배티, 용진골, 새울 공소에서는 여러 명의 성직자를 배출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교우촌은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에 이른다.

<가톨릭 성지 목록>

 

 

배티성지의 성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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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박물관>

 

청주교구는 배티성지를 성역화하고,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최 신부 사제 서품 150주년을 맞은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는 ‘하느님의 종' 최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현양 활동과 시복 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1999년 최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 2칸짜리 초가집은 다블뤼 주교가 신부 시절이었던 1850년

대목구장 페레올 고 요한 주교로부터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설립 지시에 따라

배티 교우촌 안에 소성당 및 사제관 겸용으로 사용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2002년 12월 3일에는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을 신축했다.

 

충청북도가 2011년 3월 4일 배티의 ‘조선교구 신학교지’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소’

그리고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역’ 등 3곳을 충북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하면서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시작됐다.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 기공식을 2011년 4월 15일 가졌고,

2012년 4월 15일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고딕 양식 건물을 완공했다.

2012년 10월 10일에는 최 신부 일대기와 박해 시대의 역사 및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보여줄 최양업 신부 박물관을 착공,

2014년 4월 11일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한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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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대성전>

 

배티성지에 있는 성모상들은 거의 모두가 충북 감곡 매괴성당의

'칠고의 성모상' 모습을 하고 있다.

매괴성당 주임 신부를 역임한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가

배티성지에 부임해서 그렇게 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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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과 그 앞에 놓인 형구돌 - 연풍성지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