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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배티의 알려진 순교자 그리고 누군지 모를 순교자들의 묘소.

 

복자 장 토마스와 동료 7위 순교자 현양 조형물 - 둥근 모양은 성체를 형상화한 것이다..jpg

                                   <묘소가 없는 복자 6인 현양 조형물 -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815.

                             - 둥근 모양은 성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1866년)와 무진박해(1868년)로 큰 타격을 받았다.

기록상 이 지역에서 1866~1868년 사이에 순교한 신자들은 29명에 이르는데,

모두 배티, 발래기, 지장골, 동골, 용진골, 정삼이골, 굴티, 절골 교우촌 주민이었다.

이들 행적이 알려진 순교자 중 8명이,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석차 사목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이날 복자가 된 123위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맞는다.

배티 출신 8명의 복자들은 다음과 같다.

 

 

배티 출신 8명의 복자, 복녀

 

김원중 스테파노 (?~1866)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01.png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발래기 신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전갈을 보내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바치고 관장 앞에서 배교를 다짐하라.”고 명령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서적을 제출하고,

관장 앞에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김 스테파노는 “내가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서적도 바치지 않고 관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 소식에 외교인들은 물론 신자들까지도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해

김 스테파노를 원망했다.

 

1866년 11월 10일(음력 10월 4일), 관아에서는 다시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김 스테파노는 교우들에게 “이제 들어가면 전부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믿음이 깊은 사람만

관아로 가자.”고 권유했다.

 

이튿날 진천 관아에서 포졸들이 왔을 때,

김 스테파노를 비롯한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됐다.

그들에게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었다.

김 스테파노는 책을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저의 책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관아에서는 곧바로 그를 가두어 버렸고, 이때 신성순 회장과

2명의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선언했다.

 

네 사람은 25일 동안 갇혀 있다가 12월 6일(음력 10월 30일) 공주로 압송됐다.

김 스테파노는 압송되기 전에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너도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하여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고,

아내에게도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라고 써 보냈다.

네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고,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김원중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을 장사 지내 주었다.

<성인목록. 배티성지>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01.png                죽산-병인박해순교자묘에 조성된 오 마르가리타 묘소 - 오른 쪽-01.jpg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                              <죽산 병인박해순교자묘에 조성된

                                                                             오 마르가리타 묘소 - 오른 쪽.>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 9. 28.)는 오 마르가리타(?-1868)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부는 부모를 모시고, 아우와 맏아들 안토니오 등

네 아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진천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했다.

절골은 골짜기 끝자락에 있는 협소한 지역으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들 가족은 화전에 조, 콩, 수수 등을 심어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삶이었지만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독일인 오페르트 일행이 충청도 덕산의 흥선대원군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1868년 무진박해가 시작되자

경기도 죽산의 포졸들이, 신자들이 숨어 살 듯한 진천의 산간지대를 뒤지다가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 마침내 절골로 들이닥쳤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이를 눈치 채고 혼비백산하여 산중으로 피신하였으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어린 자식을 업고 숨어 있던 그의 아내 오 마르가리타가 먼저 체포되었다.

 

밤이 되어 프란치스코는 가족들도 찾고 포졸들의 동정도 살필 겸,

산에서 내려와 이웃 마을의 한 비신자 집에서 묵게 됐다.

그런데 그 비신자가 밤중에 집을 빠져나가 포졸들이 머무는 주막으로 가서

‘천주학쟁이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집에 있다.’고 밀고하였고,

프란치스코는 곧 체포되어, 아내와 함께 죽산 관아로 압송되었다.

옥에서 프란치스코는 마음씨 좋은 형리를 만나 아우 필립보에게 소식을 전해,

“우리 부부는 위주치명(爲主致命)할 것이니, 네가 혹 잡혀서 죽지 않는다면

부모께 효도하고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공경하거라.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며 살다가 죽은 뒤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자.”라고 당부했다.

 

부부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버티어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함께 순교의 영광에 들었다.

<배티성지 홈페이지. 성인목록. 배티성지>

 

 

송 베네딕도 송 베드로 부자와 복녀 이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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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송 베네딕도>

 

송 베네딕도(1798∼1867년)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가정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후 베네딕도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을 거느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송 베네딕도와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을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했다.

이후 그들을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키며 순교했다.

송 베네딕도, 송 베드로,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는 복자품에 올랐다.

<배티성지 홈페이지. 진천 관아와 옥 터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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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송 베드로>

 

충주에 살던 송 베드로(1821∼1867년)는 부친 베네딕도와

가솔들과 함께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7년 부친, 며느리와 함께 한양에서 순교했다.

그의 18세 된 처녀 딸도 이때 함께 순교하여

동정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복녀 이 안나-01.png

               <복녀 이 안나>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이 안나(1841∼1867년)는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다가 충주에 사는 송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도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며 신앙생활에 정진했다.

한양으로 압송된 후 신앙을 굳게 지켜 순교자가 되었다.

<배티성지 홈페이지>

 

 

기록과 유해가 남겨진 오반지(吳盤池 1813-1866년) 바오로 복자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묘소-01.jpg

              <복자 6인 현양 조형물 바로 위에 조성된 오반지 바오로 묘소>

 

오반지 바오로는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비교적 풍요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 천주 신앙을 접하게 된 그는

은총으로 감화되어 교리를 배우고, 세례성사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이전의 악습을 다 버리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심지가 굳고 성품이 온화해졌으나, 생계를 유지할 줄 몰라 가난하게 살면서,

빈틈없이 신앙을 실천하고 겸손하게 처신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전」에서

“그는 대단한 신심과 수긍할 줄 아는 온순함을 보였다”고 기록했다.

<복자 124위 열전>

 

얼마 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地藏골. 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 芝岩里)로 이주했다.

고려시대,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장사가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그의 깊은 신심은 주변에 널리 알려져, 박해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의 포졸들이 지장골로 들이닥쳐

한 젊은이와 함께 그를 체포, 진천에 가두었다가 청주로 이송했다.

오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고,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옥에는 그와 함께 체포된 젊은 교우와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출신인 배 바오로가 있었다.

오 바오로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이들 둘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오 바오로는 옥중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배 바오로 편에 부쳤는데,

이 편지는 며느리 서 수산나의 증언으로 「병인 치명 사적」 제1권에 수록됐다.

“교우로서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은 잘 갚도록 해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해라.”

 

영장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려 했지만 오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소." 라며 굽히지 않았다.

1866년 2월 11일(양력 3월 27일) 청주 남문 밖에서 사형을 집행하기 전,

사형 집행인이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병인박해 당시 진천 교우촌 출신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훗날 서 수산나의 증언을 따르면, 그가 순교한 뒤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신에서 하늘까지 닿았다”고 전한다.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이서 지장골로 옮겨 인근 야산에 안장했다.

 

151년이 지난 2017년 1윌 28일 청주교구 '오반지 바오로 묘소 이장위원회'가

유해를 발굴, 교구 성당과 교구청, 성지 등 6곳에 분배했다.

일부 유해와 진토는 4윌 29일, 백곡면 양백리 815-2에 조성한

새 묘소에 봉안되었다.

 

오 복자의 순교 행적에 대한 증언은 다른 순교자들과 달리 풍부하고 자세하다.

당시 조선에서 선교하다가 중국으로 탈출한 칼레 신부나 페롱 신부가

탈출 직전 지장골과 가까운 목천면 소학골에 숨어 지내며

그의 순교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문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했지만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린 신앙을 진실하게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가톨릭신문>

 

 

반지(盤池)마을

오 바오로의 이름이 된 반지마을은, 1600년경 교, 하, 노(交 河 盧) 세 가구가

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소반과 같은 형상이며 그 가운데 연못이 있어서

항상 좋은 물이 흘러나오므로, 소반 반(盤) 못 지(池)를 써서 반지라 칭하게 되었다.

<진천군 이월면 홈페이지‘ - 梨月面 沙谷里>

 

 

 

복자 장 토마스(1815-1866년)

복자 장 토마스-01.png

                 <장 토마스>

 

경기도 수원 느지지(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년 ~ 1866년 3월 30일) 성인의 6촌 동생으로,

일찍이 입교한 부모의 가르침을 받고 하느님의 종으로 자랐다.

느지지는 바닷물이 늦게 들어오고 늦게 빠진다는 지형적 여건에서

'늦어지'가 '느지지'로 변음된 곳으로<두산백과> 안동 장씨들의 고향이었다.

1845년 무렵, 그의 집안은 다가오는 박해의 손길을 피해

전국의 산간 지대로 흩어져 살아야만 했다.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에 정착했고, 토마스는 배티에 정주했다.

토마스 가족이 배티로 간 것은 친척 장 시몬 회장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몬 회장은 다블뤼 주교 때부터 열심히 교우촌 신자들을 돌보았고

페롱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의 복사로 일한 신심 깊은 지도자였다.

장 토마스는 배티에서 외아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키우는 데 노력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성실한 수계 생활을 지켜나갔다.

인품의 순량함을 잘 아는 친척과 친구들은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신자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장 토마스는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체포,

진천 관아로 압송했다가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옮겼다.

 

거듭되는 매질과 배교의 유혹을 받았으나 그는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결같이 대답할 뿐이었다.

결국 영장은 사형을 선고, 군대 지휘소로 사용되던 장대(將臺)에서

즉시 처형하라고 지시했고, 토마스는 칼날 아래 몸을 바쳐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진천 관아와 옥 터 홈페이지>

 

 

‘배티 6인 무명 순교자 묘’ 성지

 

6인 묘소 오르는 길-01.jpg      6인 묘소-01.jpg

             <6인 묘소 오르는 길>                                                    <6인 묘소>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섞여 있다.

배티는 병인박해와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하느님의 종 오반지 바오로 등 8인의 복자와 이영준 아우구스티노,

김준기 안드레아, 손관보 베드로, 오사룡, 윤 바르바라, 이종여, 김조이 막달레나,

이호준 요한 등 29명만이 교회 역사에 기록돼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무덤에 잠들어 있다.

 

포졸들이 몰려오자 허둥지둥 산속으로 피신하던 신자들은

이곳저곳에서 습격을 받아 창과 방망이, 쇠도리깨에 두들겨 맞아

고귀한 목숨을 하느님 대전에 바쳤다.

포졸들이 물러가자 살아남은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급히 수습하여

이 성재 골짜기에 묘를 만들었다.

신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1975년 당시에는 7인 묘였다.

1977년 순교자들의 후손이 2기를 찾아내 백곡 공소로 모셨고,

그 후 조사과정에서 1기가 새로 발견되어 6인 묘가 된 것이다.

박해가 끝난 뒤에는 교우들이 해마다 이곳을 찾아와 벌초를 하면서

그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으리라 다짐했다.

 

‘6인 무명 순교자 묘’를 가려면, ‘복자 6인 현양 조형물’이 있는 큰 길에서

5백 미터의 급경사를 밧줄을 잡으며 올라가야 한다.

산골짜기 속의 산골짜기, 이렇게 험한 마지막 자락까지 도망친 신도들을

포졸들은 무엇을 위해 그리 악착같이, 야차처럼 쫓아와 죽여야 했는지,

또, 그 포졸들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배티 14인 무명 순교자 묘’ 성지

 

순교자 묘소 이정표-01.jpg          14인 묘소-01.jpg

<무명 순교자 묘소 이정표>                                              <14인 순교자 묘소>

 

배티성당 앞에서 고개 길을 따라 900m 정도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오른 편에 ‘14인 순교자 묘역 입구’라는 푯말이 서 있다.

차에서 내려 숲길을 따라가면 순교자들의 묘소가 나타난다.

병인박해가 나자 배티의 신자들이 배티고개 너머 안성 병목골로 피신해,

숨을 죽인 채 살던 중, 포졸들에게 발각되자 산 속으로 도망치다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복자 6인 현양 조형물’ 앞 주차장에서 큰 길을 건너가는 방법도 있다.

큰 길에서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면 바로 순교자 묘소를 만난다.

 

 

 

 

  • 구달 2023.04.02 05:50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맘에 걸리는 한 귀절이 있다면, "또, 그 포졸들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입니다. 물론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하나 하나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이시기에 아마도 지금 그 자손들은 모두 주님의 뜻을 전하는 착한 사람들이 되었겠지요.

  • 마정 2023.04.02 11:05
    愚問賢答 고맙습니다. 그렇게 되었기를 기도해야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