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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배티 삼박골 순교자 묘와 윤의병 신부의 고마리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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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박골 순교자 묘소>

 

배티 성지 앞 큰길 남쪽 1km 정도 가면 왼쪽에 ‘삼박골 순교자 묘’ 표지가 나온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가(차를 세울 수 있는 길 끝) 왼편 언덕 위에

두 분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산 75-12)

진사(進士) 이호준 요한(李鎬俊)의 부인과 딸의 무덤이다.

 

삼박골은 배나무 고갯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왼쪽 골짜기에는 유사시 배티로 도망하던 신자들의 비밀 통로가 있다.

지금은 공소는 없어지고 집터, 우물터나 돌담의 흔적만이 보일 뿐이다.

 

 

배티 일대에는 여러 곳의 깊은 산골짜기가 있다.

박해를 피해 새 터전을 찾아 나선 경기, 충남, 충북의 신자들이

하나둘, 이 골짜기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들은 우연히 서로가 신자임을 알게 되어 함께 비밀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산을 개간하여 오죽잖은 밭농사를 짓던지 옹기나 숯을 구어 생계를 이었다.

새 신자들이 교우 촌에 들어오면 서슴지 않고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어.

삼박골 인근에는 점차 교우 촌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들 골짜기 교우 촌들도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모든 교우 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교우들을 잡아가고, 가산을 적몰하고,

가옥을 불 질러 흔적을 없애버렸다.

삼박골 신자들도 포졸에 쫓겨 골짜기를 기어올라 산꼭대기로 피신했으나,

이 와중에 이 진사의 처녀 딸이 체포되었고

이어서 그녀의 모친도 붙잡혀, 신앙을 증거한 뒤 칼날 아래 순교했다.

포졸들이 물러간 뒤, 산에서 내려온 생존자들은 모녀의 시신을 수습,

이곳에 안장했고, 인근의 신자들이 묘소를 보살펴 왔다.

 

 

이호준 진사에 대한 기록은, ‘나무위키’ ‘흥선 대원군’에 나타난다.

‘흥선 이하응은, 사돈 이호준에게서 그의 본처 사위인 조성하, 조영하를 소개받았고,

그들을 통해 그들의 고모이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 조 씨, 조 대비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아,

결국, 12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고종 高宗)에 앉히는 데 성공한다.

대원군이 첩에게서 낳은 딸을 이호준의 첩이 낳은 아들 이윤용에 시집보내

두 사람은 사돈이 된 것이다.’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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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의병 신부의 소설 은화>

 

윤의병 신부가 쓴 소설 은화(隱花)에는 이 진사가 이렇게 소개된다.

‘이 진사는 평창 이 씨로, 부친 이규복 진사가 경기감사 이익운(요한)의 집에 갔다가

책상 위에 놓여있는 ‘명증’이란 책을 읽고,

주 신부<주문모 周文谟 신부인 듯–1792년 조선 입국>에게서 영세를 받았다.

이 진사는 남인이었으므로 같은 남인인 이하응과 교의가 두텁게 지냈는데,

어느 날 대원군 집에 있을 때 급한 편지가 전달되었다.

얼핏 보니 대원군과 관계가 있는 글이라, 의심 살 것 같아 그 앞에서 읽는다.

남종삼 성인의 아버지 상교(南尙敎)의 편지로 ‘대원군에게 잘 설명하여

입교시키라’라는 것이었다. 이를 본 대원군의 표정이 밝았다.

그러나 이후 대원군은 천주교를 억압하기로 마음을 바꿔,

이 진사에게 서울을 떠나라고 권한다.

이렇게 해서 이 진사가 진천 삼박골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두 글을 보면 소설 은화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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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박골 터>

 

박해가 끝나 가는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이 다시 모여 교우 촌을 재건했다.

그 결과, 충청도를 전담하는 두세 가밀로(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가

1888년 배티에, 1892년에 새울과 용진골에,

1893년에는 삼박골에 공소를 설립했다.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의 무덤이 많이 섞여 있다.

배티는 스스로 찾아온 복음의 진리를 온몸으로 살아간 신앙의 현장이며,

수많은 혈색(血色 또는 적색 赤色) 순교자와 백색(白色) 순교자를 배출해서

한국의 카타콤(Catacomb ;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 이라고 불린다.

 

 

 

충북 지역 두 번째 본당이 된 고마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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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리공소>

 

충북 괴산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186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1860년대 순교자들의 후손들이 문경, 가은, 상주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고마리로 숨어들어 왔다고 한다.

이후 박해가 종식되자, 1887년경부터 고마리 교우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사적지>

 

여주 ‘부엉골본당’(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의 마르탱 신부(Martin 沈良 1866~? 레온)는

1892년 고마리에 공소를 설립했다.

1894년부터는 장호원 본당<부엉골에서 장호원으로 이전, 현재의 감곡성당.>의

부이용 신부(Bouillon 任加彌 1869~1947 가밀로)가 관장하면서

24명으로 시작된 공소는 1896년에 85명, 1902년 이후 100명 이상,

1909년에는 132명의 신자로 늘어나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고마리공소는 충북 지역 두 번째 본당으로 승격돼

1920년 9월 23일 초대 주임으로 윤의병 바오로 신부(尹義炳 1889~1950?)가 부임,

괴산, 청주, 보은, 음성과 진천 지역의 일부 등 22개 공소에서 사목하게 되었다.

<고마리공소 성지 홈페이지>

1936년 4월 고마리본당은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로 이전하였고

남겨진 고마리본당은 16년 만에 다시 공소로 되돌아갔다.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 874(槐山郡 沼壽面 叩馬里). 원소로 고마리2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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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리공소 성전>

 

고마리의 ‘고마’는 ‘말(마 馬)을 잡아당긴다(고 叩)’란 뜻이다.

중국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할 때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할 수 없다’라고

말고삐를 붙잡고 간하다가 쫓겨나 결국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데서

충신의 충언을 뜻하는 ‘고마이간(叩馬而諫)’이라는 성어가 생겼다.

 

조선 초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자,

형조판서를 지낸 허 후(許 詡)는 잘못되었음을 간언하다가

거제도로 귀양 가던 중 괴산 고마리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훗날 허 후의 아들 허 조(許 慥)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자결한다.

세조는 허 조의 아들 연령(許延齡), 구령(許九齡)도 모두 참수했다.

그러나 셋째 아들 허 정(許 精)은 태어난 지 15일밖에 되지 않아

15세 되는 해에 형을 집행하도록 선고됐다.

 

허 정이 15세가 됐을 때는 세조가, 많은 신하를 죽인 것을 후회하던 차라

그를 죽이지 않고 충청도 괴산으로 귀양 보냄으로써,

허 정의 후예인 하양 허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된 것이다.

 

이후 정조는 허 후의 청렴결백하고 충성스러운 간언을 한 행위가

백이, 숙제에 버금가는 ‘고마이간’이라 하여

이 마을이 ‘고마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사적지 등>

 

 

윤의병 신부와 군난(窘難) 소설 은화(隱花)

 

 

윤의병 신부 공적비-01.jpg        윤 신부 공적비-01.jpg

                        <윤의병 신부 공적비>                                          <윤 신부 공적비>

 

“윤의병 바오로 신부는 파평 윤 씨로 순교자 윤자호 바올로(尹滋鎬)의 손자이다.

  1889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군 청룡마을에서 출생, 1903년 용산신학교 입학,

  1920년 9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민 주교님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고마리본당으로 초임 발령을 받아 12년간 전교 활동에 몸 바쳤다.

  1932년 경기도 행주본당으로, 1935년 황해도 은율본당으로 영전하여

  전교하면서도 많은 사업을 벌였으며 그 중 소설 은화 집필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고마리공소에 건립된 윤의병 신부 공적비>

 

윤의병은 ‘소년 시절에 용진골(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 할아버지(상운 相雲. 친동생 상우 相雨의 아들이 윤의병.)가 세운 글방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9년 전후에 그는 서울 용산신학교(신품학당)에 들어갔다.’

<윤형중 尹亨重 마태오 신부 - 윤의병의 5촌 조카.>

 

순교자의 자손으로서 윤의병 신부는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

특히 배티 지역의 피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마침 배티 일대인 용진골(용덕리), 절골(용덕리), 동골(양백리), 발래기(명암리),

퉁점(명암리), 삼박골 등도 고마리성당 관할이었으므로 봄 가을에 전교를 나가,

군난을 겪은 노인들을 만나면 체험담을 열심히 들어 수집하였고,

교우들이 숨었던 굴이 있다면 반드시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이때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저술한 군난<천주교 박해를 이르는 말.> 소설이

‘숨은 꽃’이란 뜻의 ‘은화’이고, 삼박골이 소설의 주 무대가 된 것이다.

 

윤의병신부-02.jpg                   윤형중 신부-01.jpg

                <윤의병 신부>                                            <윤형중 신부>

 

은화는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은 1939년 1월부터 ‘죽총’(竹叢) 이라는 필명으로

윤형중(1903-1979) 신부가 주관하던 “경향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일제 말기 ‘경향잡지’가 1년여 휴간되었던 기간을 제외하고

1950년 6월까지 총 125회 게재되었으나, 윤의병 신부가 1950년 6월 24일

한국 전쟁 발발 전날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해주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됨으로써, 미완성의 소설이 되었다.

 

1977년에 은화를 소설로 출판한 것은 이계중 요한 신부(李啓重)였다.

그는 자비로 이 책을 내놓아,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요한 신부는 은율 출신으로, 윤의병 신부가 뽑아

신학교로 보내어 신부가 된 분이다.

 

“우리나라 가톨릭의 문화에서 은화는 천만금의 가치가 있다.

 군난 때의 무시무시한 분위기는 소설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길이 없었고

 당시의 교중 풍속이며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실감있게 엮어낸” 걸작이다.

<윤형중 신부 – 발간 소개의 글>

 

가톨릭 필독의 소설이다, 꼭 한번 읽으시기를 권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훌륭한 책이 비치된 책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주위의 바오로 딸 서점에도 없었다.

바오로 딸 서점에 부탁, 출판사에 연락해서 겨우 구했다.

그리고 바로 다 읽었다, 단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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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리공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