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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대구 경상감영 - 감옥 터 – 형장 터

 

경상감영-01 - 선화당-01.jpg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 관찰사가 공무를 보던 곳으로 안동에 있던 건물을 선조 34년(1601)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670, 1730, 1806년 세 차례의 화재로 타 버린 것을 순조 7년(1807년)에 재건했다.>

 

대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은 조선 선조 때부터 감영이 있던 곳으로,

그 터를 보전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 포정동 감영공원>

 

경상감영은 조선 지방 행정의 8도 제하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으로,

조선 초기 경주(慶州)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 상주(尙州), 팔거현, 달성군,

안동부 등지를 옮겨 다니다 선조 34년(1601년) 대구로 이전, 정착했다.

1910년부터는 경상북도 청사로 쓰였고, 1966년 경북도청이 산격동으로,

2016년에는 안동시로 이전함으로써, 1970년 감영 터에 중앙공원이 조성됐다가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감영에 파견된 관찰사(觀察使 또는 감사 監使)는 관할지의 행정, 사법권뿐 아니라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도 겸직함으로써 군사 지휘권까지 가져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박해 시대에 경상도 일대의 많은 신자가 잡혀 와

혹형 속에 믿음을 증거하고 순교한 신앙 증거 터이다.

경상감영-05-징청각-01.jpg       경상감영-06-선화당 측우기-01.jpg

                                <징청각(澄淸閣)>                                                              <측우대 >

< 관찰사의 처소인 징청각은 1601년에 건립됐다.  화재를 당해 정조 13년(1789년)에 새로 지었으나                 1806년 다시 불에 타, 1807년에 중건했다.>   

 

<선화당 앞의 측우대는 전면과 후면에 새겨진 명문으로 제작 시기가 1770년(영조 46년)임이 밝혀졌다.

   측우대는 측우기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지칭한다. 경상 감영에 있던 측우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측우대는 국보 제330호로 지정되어 국립기상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현재 선화당 앞 측우대는

   복제품이다.> 

 

                                                                                        

♱ 순교자

 

◆ 복녀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金允德 ? ~ 1815년)

복녀 김윤덕 아가타-01-김효애 작.jpg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은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했다.

<경상감영 성지 홈페이지에는 은재를 ‘현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 돌마래미’로

  기록하였으나, 문경시 가은읍(加恩邑) 저음리(猪音里)가 맞다.

  가은읍은 1973년 7월 1일에 가은면과 상주시 이안면 저음리가 합쳐져서

  문경시의 읍으로 승격된 곳이다.- 문경시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 등.>

 

돌마래미라고도 불리는 저음리는 1620년쯤 '함의우'라는 선비가

처음 개척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밤만 되면 주변 산에서 멧돼지가 나타나

몹시 소란스럽게 울부짖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돌마람이라 부르다가

후에 돌마래미로 변음됐다고 한다. <매일신문 2018. 12. 30.>

 

김 아가타 막달레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노래산 교우촌

(老萊山 743m. 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리)으로 이주했다.

<산의 형세가 네 신선(神仙)이 걸어가는 발 모양 같이 생겨

   '늙은 보래(神仙)들이 오는 곳'이라 해서 노래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김윤덕은 1815년 2월 22일경,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붙잡혀

경주감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관헌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조물주이신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풀려났고, 막 감영의 대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김 안드레아는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힘써 권면했다.

 

김 안드레아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 아가타 막달레나의 신앙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가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이는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관장은 화가 나서 심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니, 살점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끌려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1815년 음력 4월 말 또는 5월 초로,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 복자 신석복 마르코 (申錫福 1828∼1866년)

신석복 마르코-01.jpg             마산교구 진영 성당 공원묘지의 신석복 마르코 묘-01.jpg

                    <복자 신석복 마르코>                    <마산교구 진영성당 공원묘지의 신석복 마르코 묘>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 마르코는

장사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하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때는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이에 앞서 대구 포졸들은 신 마르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정보를 듣고는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했다.

그가 장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캐내고,

돌아올 만한 길로 달려가, 김해 가산에서 붙잡아 밀양으로 압송해서

무수한 형벌을 가한 뒤 대구로 끌고 갔다.

그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서 일행을 뒤쫓아,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진행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로 인해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 했고

대구에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다.

그런 다음 며칠을 가두었다가 1866년 3월 31일(음 2월 15일) 교수로 처형했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 고향에 안장했다.

2014년 8월 16일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천주교 성인목록 등>

 

 

대구 경상감영 옥 터 성지

경상감영-09-옥 터-01.jpg       경상감영-10-대안성당-01.jpg  경상감영-13-감옥 터-01.jpg         <경상감영 옥 터 – 서문로 교회가                 <대안 성당>           <대안성당에 있는 옥 터 안내판>

          자리 잡고 있다.>

 

대구시 중구 서성로16길 21(서내동 8-1), 현재의 서문로 교회 자리에 있던

경상감영 감옥은 여섯 명의 하느님의 종이 신앙을 증거하다 옥사한 곳이다.

<감영공원 인근 대안성당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7명이 옥사했다고 쓰여있다.>

 

 

♱ 순교자

 

◆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 (金時佑)

감사를 설득하는 김시우 알렉시오-01.jpg

            <감사를 설득하는 김시우 알렉시오>

 

1783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김시우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인 탓에 혼인할 수가 없었고,

일하기가 어려워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했다.

<성인목록에는 1783~1816, 감영 옥 터 성지 홈페이지에는 1782~1815로

되어있다.>

 

일찍이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 알렉시오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김시우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했다.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 포졸들이 교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 포졸들에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서 잡아가지 않는군요?”라고 울면서 말했다.

안동으로 끌려간 김 알렉시오는 여러 차례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고

천주교 주요 교리를 박해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려고 시도했다.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압송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을 구하시려고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라고 설파했다.

감사는 그의 턱을 부수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고

사형 선고문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은 다음 옥으로 돌려보냈다.

김 알렉시오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어, 이송된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 때문에 옥사했으니,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이었다.

 

이후, 김 알렉시오의 열심과 재능, 변론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가 신자들에게 전해졌고,

이를 듣는 모든 신자가 그를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시우는 2014년 8월 16일 시복됐다.

<성인목록, 경상감영 옥 터 홈페이지>

 

 

◆ 복자 최봉한 프란치스코 (崔奉漢 ? ∼1815년)

복자 최봉한 프란치스코-01-탁희성 작.jpg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난 최봉한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했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안드레아)과 구성열(바르바라) 부부는

그의 장인과 장모이다.

이후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던 중 주문모 신부 입국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했다. 부친은 이 무렵에 타계했다.

최 프란치스코는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 최필공 등과 가깝게 지냈다.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누이를 정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그대로 살게 하고,

시골로 내려가, 혼인해 살다가, 가족과 장인 장모를 모시고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으로 옮겼다.

1815년 부활 대축일에 급습한 포졸에게 붙잡혀 경주로 압송됐다.

감옥에서 장모 구성열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그녀를 권면했다.

대구로 이송된 후에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해 1815년 5월경(음력)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는 30세가 갓 넘었었다.

 

 

◆ 복자 서석봉 안드레아(徐碩奉 ? ∼1815년)

 

    서석봉 안드레아-01.jpg구성열 바르바라-01.jpg

                                    <서석봉 안드레아>                                     <구성열 바르바라>

 

서석봉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바르바라)의 남편이며,

복자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천주교 신자자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구 바르바라와 혼인한 후 사위 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했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아내,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됐다.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 복녀 구성열 바르바라(具性悅 1776 ?-1816년)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은

성격이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한 그녀는,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해,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으로 가서 살다가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됐다.

 

경주에서 받은 혹독한 형벌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할 마음까지 먹었었다.

이때 사위 최 프란치스코가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설명하고 순교를 권면하자, 다시 신앙을 다잡고 모진 형벌도 꿋꿋이 참아냈다.

대구로 이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거듭 받으면서 17개월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견뎠다.

그동안 남편과 사위는 옥사했다.

구 바르바라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면서 모든 고통을 이겨내었고,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은 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이 거두어 적당한 곳에 안장했다.

 

 

◆ 복자 박경화 바오로(朴甫祿 1757∼1827년)

관장의 명으로 대구감영에서 승려와 토론하는 박경화 바오로-01-탁희성 그림.jpg

<관장의 명으로 승려와 교리를 토론하는 박경화 버오로>

 

 

박경화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재산이 좀 있는 데다가

인품도 좋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몸으로 33살 무렵 입교했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입교 얼마 후 일어난 박해로 체포됐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신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박 바오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비신자들의 입교에 힘쓰며, 자녀들이 열심히 덕행을 닦도록 모범을 보였다.

 

60세가 지나서 바오로는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했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옮겼다.

<가마기 : 현,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 가마솥 모양의 늪이 있어서

                가마기 또는 부연(釜淵 가마 연못)으로 불린 것 같다.

   멍에목 : 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길 6. 멍에목성지.

                지형이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렇게 불린다.>

 

박 바오로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됐다.

그는 상주로 끌려가는 동안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여,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옥중에서는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거나 보살펴 주었다.

 

상주 관장은 그를 대구감영으로 이송했고, 그의 자식들도 굳게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끌려갔는데, 장남 박 안드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구 감사는 사형을 선고한 뒤 한 승려와 교리에 관해 토론을 벌이게 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박 바오로는 더는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아들과 교우들을 불러 놓고

“이곳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라고 당부한 디음,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 평온한 기색으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드렸다.

5개월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자 발굴했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 복자 김세박 암브로시오 (金世博 1761∼1828년)

입교를 반대하는 가족을 버리고 ---김세박 암브로시오-01.jpg

<입교를 반대하는 가족을 버리고 ---김세박 암브로시오>

 

김세박은 한양의 역관 집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먼 친척이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나 가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특히 성격이 포악한 아내는 그의 신앙을 심하게 방해하고, 천주교를 욕했다.

이에 김세박은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암브로시오는 수색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했다.

그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의 소재지를 밀고하라는 추궁을 받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한 달 뒤, 김 암브로시오는 대구로 이송되어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음식을 완전히 끊기로 작정하고 철저하게 금식재를 지켰다.

형벌과 금식재로 쇠약해진 김 바오로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에 옥사로 순교했다.

 

 

◆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 (1774∼1835년)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안군심 리카르도-01.jpg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안군심 리카르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은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을 생계 삼아 살아갔다.

명랑한 데다가 겸손하고 친절했던 안 리카르도는 누구나 애덕으로 대하고,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을 낙으로 알았다.

그는 자식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고,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으며,

보통 일주일에 세 번씩은 금식재를 지켰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동안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서적이 많았으므로

언젠가 자신도 체포되리라고 생각했다.

얼마 동안 숨어 지내면서 순교할 준비를 하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붙잡혀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경상감영 형장 터 성지

경상감영-15-형장 터 부근-01.jpg

 

대구 서문 밖 말전 골목(현 시장 북로)에 이층 누각 오리정(五里亭)이 있었는데

달성공원 사거리 남쪽 약 100m 좌측에 있는 오토바이 골목 주변이

오리정 마당으로 추정된다.

오리정은 읍성 이북의 교외를 정찰하는 망루였는데 그 마당에서 오일장이 섰고,

이때 중죄인들을 이곳에서 참수 혹은 교수형으로 처형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치명 당한 순교자들의 이름은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사학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하여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번화한 상가로 변화됐다.

 
 
  • 구달 2023.07.06 04:52
    마정의 글이 횟수를 더할수록 새로와 지는데 이제 사진은
    대부분 칼러로 보이니 새로운 맛이 넘치네.

    우리 할아버님은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시어 사시다가 후에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 오감마을 남한강 가로 옮겨 사셨다 하네.
    어렸을 때 몇번 가봤는데 참 아름다운(웠던) 곳이(었)지.

    동네 전체가 천주교 신자들이었고 옹기를 구어서 파는 것이
    마을의 적지않은 수입원이었다 하네. 625 환난 중에도 희생이
    전혀 없었던 것은 교우들의 철두철미한 "형제 감싸주기"의
    덕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라네.

    지도에서 보니 오감마을에 천주교 공소가 있는데 주일날 여주
    성당에 가는 길이 멀고 힘들어서 시작한 일이었지. 남한강을
    건너갔다 건너와야 하는데 뱃사공 고생이 힘들었다 하네.

    여하튼 집안에서 나온 성직자로는 아버님의 6촌형 박희봉 신부
    그리고 염수정 추기경은 나의 8촌형이라 하네. 중학교 때 한번
    그분 집에서 만났는데 그때 벌써 인품이 훌륭했었지.

    마커스 진용 드림
  • 마정 2023.07.06 11:08
    나이 들면서 눈물이 많아졌어. 예전에, 누님이 TV 연속극을 열심히 본다고 우숩게 봤었는데, 이제는 내가 연속극 애호가가 되었고, 어떤 대목에서 내가 잘 우는지 스스로를 관찰해 보니까, '가족 관계 이야기'를 보면서 궁상를 떨더라구. 교우촌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이리 훌륭한 손자를 보고 얼마나 대견스러우셨을까? 일정 기간 내에 새 글을 안 올리는 동아리는 홈페이지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엄포가 무서워 시작한 성지순례기가 90회에 이르렀으니, 당초 마음먹은 100회를 채울 것 같네. 읽어 주고, 격려헤 주는 분들 덕분일세,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