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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대구 : 계산동성당, 관덕정 순교 기념관,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성모당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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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동성당>

 

대구 계산동성당(중구 서성로 10. 계산동 2가 71-1)은 경상도 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1886년 블랑(Blane 白圭三) 주교가 설립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 달구벌 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경상도 지역에 본당이 처음 설립된 것은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1877년 입국,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로베르 신부(Robert 金保祿)가

전담 신부로 임명됐으나, 박해의 여파가 남아있는 대구 지역에 부임하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경상도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했다.

로베르 신부는 1885년 경상도 칠곡(漆谷)의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 枝川面 蓮花里)에 정착,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7년 로베르 신부는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상리동)의

대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겨 ‘대구 성당’을 설립, 이것이 바로 계산동성당의 전신이다.

 

김보록 로베르 신부는 1897년 남산동(현 계산동)에 대지를 사들여서

그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성당 건축을 시작,

3년만인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 성당을 완공했다.

그러나 이 성당은 1년도 못 되어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로베르 신부는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하고,

서울 명동성당과 전주 전동성당의 설계도를 입수, 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색유리와 철물은 프랑스와 홍콩 등에서 수입했고,

명동성당을 건축했던 벽돌공, 석공, 목수 등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다 썼으며,

부지 공사나 벽돌 만들기 들은 일반 신자들이 맡아 진행했다.

계산동성당 대성전.jpg         계산동성당 대성전 제단.jpg

                       <계산동성당 대성전>                              <계산동성당 대성전 제단>

 

드디어 1902년 5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 성당이 준공됐다.

교우 수가 늘어남에 따라 1918년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11일 다시 축성식을 열어, 오늘날의 모습을 드러냈다.

 

대성전 제대 하단부 중앙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팔)가 안치되어 있다.

 

성당 정문 앞마당 한가운데 있는 대형 십자가는 드망즈 주교(재임 1911~1938)

부임 25주년이며 교구 설정 25주년, 주교좌성당 25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다.

또,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1986년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다.

<계산동성당 홈페이지, 성지목록 등>

 

성당 정문 건너편 언덕에는 대구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대구제일교회가 자리 잡아

최초의 성당과 최초의 예배당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계산동성당은 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하다.

<나무위키>

 

로베르(Robert Paul Achille 김보록 金保祿 바오로 1853~1922) 신부

앞마당에 세워진 로베르 신부 동상.jpg        김보록 로베르 신부-002.jpg

         <앞마당에 세워진 로베르 신부 동상>               <김보록 로베르 신부>

 

1853년 프랑스 오트 손(Haute-Saone)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계산동성당 홈페이지와 가톨릭대사전에는 1863년생으로 돼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성지목록에는 1853년, ‘구글’에는 1853. 10. 21.로 명기돼 있고,

   사제 서품일이 1876. 12. 23.이니까 1863년생은 13세로 사제가 될 수 없다.>

 

그곳에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 뮈텔(Mutel 閔德孝) 신부와 함께 공부했고,

1876년 12월 23일 사제 서품된 뒤,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월 25일 두세 신부와 파리를 출발, 베트남과 상해를 거쳐 3월 만주에 도착했다.

그곳 차쿠(岔溝)에서 여러 차례 한국 입국을 시도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주교를 만나,

많은 위험을 겪은 끝에 9월 23일 황해도 장연(長淵) 앞바다에 도달,

리델 주교는 서울로 가고, 로베르 신부는 황해도 배천(白川)의 한 교우 집에서

우리 말과 관습을 익히며 전교 활동을 준비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은둔하며 전교 활동을 펼친 로베르 신부는 강원도 홍골,

경기도 지평(砥平) 고시울, 강원도 원주 부엉골 등지에서 전교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1886년 초 대구 본당 초대 주임이 되어 본당을 짓고, 성영회(聖嬰會)를 운영하면서

많은 고아를 돌보았고, 초등학교를 세워 남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명도회라는 청년들을 위한 가톨릭 단체도 만들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교구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던 로베르 신부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병이 심해져 1911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수술을 받고 요양하다가

1913년에 재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19년에 병이 재발해 9월에 홍콩으로 떠나 휴양하다가 이듬해 5월 귀국,

드망즈 주교에게 은퇴를 요청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대구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에서의 오랜 전교 활동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선종, 교구 성직자 묘지에 모셔졌다.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대구 관덕정(觀德亭) 순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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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덕정 순교 기념관>

 

관덕정 순교 기념관 성지(중구 남산 2동 938-19. 중구 관덕정길 11)는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사형 터에 세운 기념관이다.

관덕정에서는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수많은 교우가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관덕정과 옥에서 순교한 신자 수는 지금까지 밝혀진 분만 44명에 이른다.

 

관덕정은 조선 시대 무과 시험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조선 영조 25년에 세운 건물이다. 옛 이름은 관덕당(觀德堂)이었다.

아미산 언덕 밑 전부에 해당하는 너른 앞마당이 활쏘기와 말타기의 연병장으로,

국사범의 공개 처형에도 쓰여서, 1864년 3월에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처형되기도 했다.

 

관덕정이 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 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이다.

사형 터로 고증된 병원 옆 땅 1백 55평을 확보하여 1985년 순교 기념관을 착공,

1991년 1월 20일 지하 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했다.

 

지하 경당에 있는 성인 유해실 제대에는 18명 성인과 18명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인은 김대건 안드레아, 가독교 발전의 바탕을 마련한 사도 바오로 등이며,

복자는 동남아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원들이다.

또, 영남 지역 천주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순교 성인과 복자들

 

♱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23∼1867)

관덕정 순교기념관 정문의 이윤일 성인.jpg

         <관덕정 순교 기념관 정문의 이윤일 성인>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 모두 선대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어서

박경화 바오로 등 순교자들이 나왔고 전교회장들도 있었다.

이 요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데 힘썼다.

<관덕정 순교 기념관 성지 홈페이지, 가톨릭사전 등에는 출생연도가 1823년으로,

   성인목록 등에는 1816년으로 돼 있다. 그러나, 성인목록 본문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45세‘라고 쓰여 있으니(병인박해는 1866년) 1816년생일 수가 없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경상도 문경의 여우목골로 이주,

공소 회장을 맡아 30여 명을 입교시키는 등 교우촌 융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안동교구 문경 여우목 성지 홈페이지>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포졸이 교우촌을 습격, 이 요한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을 체포해 문경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경에서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어 석 달 동안 온갖 악형을 견디고

1867년 1월 4일 사형 언도를 받아 대구로 옮겨졌다.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이윤일은 관덕정으로 끌려가

십자성호를 긋고 한칼에 목을 잘려 순교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에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성인 목록>

복자 고성대 베드로-001.jpg       대구 감옥의 고성대 성운 형제.jpg

             <복자 고성대 베드로>                      <대구 감옥의 고성대 성운 형제>

 

♱ 복자 고성대 베드로 (高聖大 ? ∼1816)

고성대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아우 고성운 요셉과 함께 지성으로 부친을 모셨고,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의 권면에 열심하여 모든 신자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고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했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했지만, 살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 베드로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라고 되뇌곤 했다.

 

다시, 아우와 함께 경상도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옮겨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을해박해가 시작된 1815년 2월 22일 경,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고성대 형제와 교우들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붙잡혀 경주로 압송됐다.

그들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고 배교를 거부하는 신자들은

대구로 이송되어, 형제는 형벌을 받으며 17개월 넘게 옥중 생활을 견뎌내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고 베드로는 혼인을 하지 않고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복자들은 모두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차

  한국을 사목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됐고, 그들의 축일은 5월 29일 한 날이다.>

 

 

 

♱ 복자 고성운 요셉 (高聖云 ? ∼1816)

충청도 별암에서 태어난 고성운은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됐다.

본래 성격이 착하며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고, 효성으로 부모를 모셨으며

형제끼리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다.

형과 함께 경상도 노래산에 살던 1815년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포졸들에게 잡혀 경주를 거쳐 대구로 압송, 17개월 넘는 옥중 생활을 하고,

1816년 12월 19일 형과 함께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jpg            복자 김사건 안드레아-김효애 작.jpg

          <효성이 지극했던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                    <복자 김사건 안드레아>

 


♱ 복자 김사건 안드레아 (金思健 1794∼1839)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은 어릴 때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 타대오가 그의 아버지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 시몬이 큰아버지였다.

본디 김 안드레아의 집안은 부유했으나,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부터

재산을 버리고 이곳저곳으로 이주해 다닌 탓에 가난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이 피신해 다닌 곳은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지였다.

그러다가 김 안드레아는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라고 여기면서 당시의 일을 후회하곤 했다.

 

아버지가 유배 간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로 이주, 기도와 전교,

성경 읽기에 많은 시간을 바치면서 교리의 실천에 힘썼다.

또, 신자 가정을 찾아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전해 주거나 교리를 가르쳤고

죽음을 맞은 비신자 자녀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나도록 형벌을 받았으나 기쁜 마음으로 참아냈다.

대구로 압송된 그는 12년 동안을 옥살이를 했다.

그때까지 함께 갇혀 있던 신자는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등이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를 다 해 장사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했다.

 

 

♱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 (朴士儀 1792∼1839)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사의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박 안드레아의 신앙심은 깊어져만 갔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해 살다가

1827년 정해박해가 발생하자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옮겼다.

4월 그믐쯤 그들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상주에서 그들 부자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됐다.

박 안드레아는 혹독한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었으나

노령의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졌다.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했고

관장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1827년 11월 15일 아버지가 옥에서 순교한 뒤, 아들은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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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이재행 안드레아>                <교회 규율을 잘 지켰던 김화춘 야고보 복자>

 

♱ 복자 이재행 안드레아 (李在行 1776∼1839)

충청도 홍주 출신 이재행은 20세가 넘어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했다.

성격이 꼿꼿하면서도 관대해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이주 생활을 함으로써 가난해 졌으나

인내심과 박애 정신을 보여 주었고, 가족들을 올바른 신앙생활로 이끌었다.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살고 있던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안동으로 끌어갔다.

관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그가 꿋꿋한 목소리로 거부하자

대구로 이송시켰다.

 

이후 이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임금이 사형 집행을 승인하여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 복자 김화춘 야고보(金若古排 ? ∼1816)

김화춘은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시 청라면)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가 그의 형이다.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야고보는 어렸을 때 형과 함께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다.

장성한 뒤에는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큰 힘이 되고자 애썼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경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그는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모진 형벌을 신앙으로 극복한 뒤

고성대 고성운 형제, 구성열 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에서 여러 달을 갇혀 지내는 동안, 여러 차례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감사도 마침내 그의 신앙에 굴복하여 회유를 단념하고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옥중에서 편지를 쓰는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탁희성 작.jpg         복녀 이시임 안나-김효애 작.jpg

 <옥중에서 편지를 쓰는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                   <복녀 이시임 안나 >

 

♱ 복녀 이시임 안나 (李時壬 1782∼1816)

충청도 덕산의 높은 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은 나이 들어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본디 무관으로 이름이 있었던 그녀의 집안은 천주교 신자가 된 뒤에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며 가난하게 산 것이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돼,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 요한이 오빠이다.

 

이시임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순결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살기로 작심했다. 그러나 공동체에 데려다주기로 한

교우 뱃사공 박씨는 변심하여 강제로 그녀와 혼인했고,

둘 사이에서 아들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몇 해 안 되어 남편이 사망하자 어린 종악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이 안나는 1815년에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에 갇혔다가 대구로 이송됐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녀는 아들이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을 겪었다.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야 임금의 재가를 얻었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안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 (金宗漢 ? ∼1816년)

김종한은 충청도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성녀 김 데레사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몇 년 뒤 맏형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부친 김 비오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하자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도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

(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지냈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와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그의 일상이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로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붙잡혀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를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한 통은 교우들에게 보냈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

곧 육신, 세속, 마귀)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의 기도를 믿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옥에 갇힌 지 1년 6개월 정도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재가했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김종한 안드레아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돼

제일 먼저 칼을 받고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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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성지

1911년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된 후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교구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명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 신부를 초청하여 건립 계획을 세웠다.

1912년 드망즈 주교가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자, 1913년 9월

중국 상해에서 익명의 신자가, 성 유스티노를 신학교 주보로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을 보내오고, 대구의 신자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해 공사에 착수했다.

 

학교는 붉은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중국인 기술자와 벽돌공이 동원되었고

목수는 프랑스 영사관을 지을 때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1914년 5월 3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수였던 샤르즈뵈프 신부

(Chargeboeuf 宋德望 1867~1920 스테파노)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그해 10월 1일 58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다.

학제는 용산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두 학과는 각각 2학급이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했다.

1918년 2월 23일에는 주재용 바오로(朱在用 1894~1975)가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도 이 학교 출신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12길 47. 남산동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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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스티노 성인>

 

 

철학자이고 순교자인 유스티노는 2세기 초 사마리아 지방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여 많은 글을 썼다.

그 중 ‘호교론’과 ‘트리폰과의 대화’ 두 가지만 보존되어 내려온다.

 

유스티노는 체포되어 로마 총독 루스티쿠스 앞으로 끌려갔다.

총독이 말했다. "너는 스스로 학식 있고 참된 교설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의 목을 자른다면 너는 천국에 올라가리라고 믿느냐?

천국에 올라가면 어떤 상급을 받으리라고 상상하느냐?"

유스티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건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저는 주님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선한 삶을 살아간 모든 사람이

마지막 날이 되면 천상 상급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AD 165년경, 유스티노는 참수형으로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가톨릭 성인 자료실>

 

 

드망즈 주교 (Demange Florian 安世華 1875~1938 플로리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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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동성당의 드망즈 주교상>

 

1875년 프랑스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3년 파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다시 이수,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신학을 전공, 1898년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1899년 부산 본당 신부로 첫 포교사업에 정진, 1년도 못 되어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

1906년 10월 19일 창간된 ‘경향신문’ 경영과 편집을 담당, 4년 만에 폐간.

1911년 4월 8일 신설 대구교구장 피선, 부임 5년 만에 교구 관리소, 신학교대성당,

수녀원 등 주요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40년 동안 조선 천주교를 위해 헌신, 대구교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교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나누어야 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고

1938년 2월 9일 대구에서 선종했다.

 

 

프와넬(Poisnel Victor Louis 朴道行 1855~1925) 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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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와넬 신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태어난 프와넬은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79년 6월 29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1880년 8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1년 8월 3일 조선으로 떠났다.

곧장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어 일본 나가사키에 기착한 그는,

때마침 조선에서 추방당한 리델(Ridel) 주교를 만나 그의 병간호를 하다가,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따라 한국에 잠입했다.

 

첫 포교지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맡았으나, 얼마 안 돼 뮈텔 신부가 귀국하자

그의 후임으로 조선교구의 경리 일을 맡았고, 장차 교회 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그의 탁월한 능력과 끈질긴 추진력으로

오늘의 명동 대성당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종현(오늘의 명동) 주임 신부로 있을 때, 건축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자,

그 뒤를 이어 오늘날 누구나 감탄하는 대성당을 완공시켰다.

그 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 역사박물관, 서울 약현성당, 서울 명동성당, 대구 계산성당,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 왜관 가실성당, 전주 전동성당, 익산 나바위성당을 설계했고

많은 성당과 부속 건물을 지을 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1917년부터 부주교를 겸임했고, 1925년 12월 26일 70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서상돈(徐相敦 아우구스티노 1850. 10. 17. ~ 1913. 6. 30.)

대구대교구청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jpg          서상돈 아우구스티노-001.jpg

    <대구대교구청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조선 및 대한제국의 민족 운동가이자 독립유공자, 기업인, 언론인, 공무원.

대구에서 지물(紙物)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 정부의 검세관(檢稅官)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1907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단연회(斷烟會)를 조직하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외세의 국권 침탈에 맞서 독립협회 주요 회원으로도 활약했다.

 

오랜 천주교 가문이었던 달성 서씨 일가들은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이후

관군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고, 서상돈 또한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 기해교난 때는

경상북도 문경, 상주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 1859년 대구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교난 때 신앙 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했으나

독학을 하면서 행상 및 포목상을 겸업하여 1886년경에는 상당한 부를 축적,

교회 발전에 힘쓰면서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했다.

본인은 거상(巨商)이 된 이후에도 평생 쌀밥을 입에 대지 않았고,

봄, 가을 곡식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 활동에 전념,

실업 진흥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에 힘쓰다 1913년 6월 30일 선종했다.

 

 

루르드 성모 동굴과 똑같이 만든 성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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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신설 대구교구장에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등을 갖추게 되면,

교구청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의 성모당을 세워

많은 신자가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성모님께 허원을 드렸다.

적수공권(赤手空拳), 맨손의 드망즈 주교에게 이것은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었다.

 

그러나, 기적처럼 2년 만인 1913년 12월 4일 주교관을 완공했고,

1914년 10월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기증한 1만여 평의 땅이 큰 도움이 됐다.

 

셋째 청원인 주교좌성당 증축은 쉽지가 않아 성모당 건립도 늦어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 신부(Saucet 蘇世德 1877~1921)가

중병으로 선종 직전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드망즈 주교는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성모님께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 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 동굴 공사를 시작,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에 성모당을 축성했다.

 

동굴 위 정면에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이라는 문구가 있다.

1911은 대구대교구 설립된 연도, 1918은 드망즈 주교가 청한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

‘EX VOTO ---’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이다.

 

2009년 3월 27일 성모당은 교황청의 교령에 따라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인 유대를 맺은 성모 성지가 되었고, 이곳을 순례하는 신자들에게는

전대사의 은혜가 주어지게 되었다.

 

성모당은 대구대교구청 안에 북향으로 세워져 있다.

대구시 중구 남산 3동 225-1. 중구 남산로4길 112.

 

 

 

 
  • KIMCHIE 2023.07.27 12:34
    평화를 빕니다. 먼 데까지 노익장 자랑 같은 성지 순례 다니며 꼼꼼하게 자료 조사하여 좋은 글 꾸준히 꾸준히 올려주는 마정. 존경스럽고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고대합니다.
  • 마정 2023.07.27 15:13
    졸문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힘 닿는대로, 전국 성지를 다 흝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