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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경주 관아와 옥 터 성지

경주관아 내아-01.jpg

                                                <경주 관아 내아>

 

조선은 건국 이후 고려의 5도 양계제(五道 兩界制)를 8도(道) 체제로 바꿨다.

고려의 5도는 양광도(楊廣道 경기, 충남북, 강원도 일부 지역),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交州道 강원도 영서 지역), 서해도(西海道 황해도 일대)이고,

양계는 동계(東界 함남 남부, 강원도 영동, 경북 울진 지역), 북계(北界 평안도 지역)였다.

 

각 도에 파견된 관찰사, 즉 감사(監使)는 감영(監營) 관할 지역에서

행정 사법권을 행사하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혹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직,

군사 지휘권도 가졌으며, 감영이 설치된 곳은 당연히 그 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상 감영은 경주부(慶州府)에 설치됐었으나 1407년 낙동강 좌우로 분리,

우도 감영은 상주목(尙州牧)에 좌도 감영은 기존의 경주부에 설치했다.

이후 다시 통합 감영을 상주목에 두었고, 1596년에는 대구로,

1597년 안동으로, 1601년에 다시 대구로 이전됐다.

 

감영은 옮겨갔으나 경주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지 않아서 종2품 부윤이 다스리고 있었다.

전국에 부윤이 수반인 지역은 경주부와 전주부, 함경도 영흥부, 평양부, 의주부 뿐이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따라서 1815년 을해박해와 1860년 경신박해, 1868년 무진박해 등 박해 때마다

경주 일원에서 체포된 가톨릭 신자들은 경주 관아에 끌려와 문초를 받았다.

 

1815년 을해박해로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 구성열 바르바라,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안치룡 등 40여 명이 고초를 당했고,

1860년 경신박해 중에도 10명의 신자가 투옥돼 있다는 최양업 신부의 기록이 있다.

"10명이 경주 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중 16세 된 소년이 옥사장에게,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열아홉 번째 서한).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가

울산 장대 벌에서 군문효수되기 전 경주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한국천주교 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주 관아 부사-01.jpg             경주관아 양무당-01.jpg

                            <부사>                                                          <양무당>

 

현재 경주문화원에서 향토사료관, 도서실, 수장고로 활용하고 있는

경주 관아 건물로는 내아(內衙)와 부사(府使), 양무당(養武堂)이 있다.

내아는 관아의 살림집으로, 창건된 이래 현 위치에 그대로 유지돼 있다.

관리들의 사무실인 부사와 무관들의 사무공간인 양무당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 말에 제작된 지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시 중앙로 67-1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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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숭고한 모습을 지켜본 동부동 은행나무.

  600살 정도로, 관아를 지을 때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

 

경주 옥 터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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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 터>                                                 <감옥 터 표지석>

 

경주시 동부동 일대는 조선 시대의 관아가 있던 자리인데,

서부동 옛 문화중고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우방명사마을 공사 중에

당시 감옥 터가 발굴되었다.

옥 터는 현재 우방명사마을 아파트 정문에서 약 100m 들어가

좌측 110동 건물 앞쪽 원형 화단 자리이다.

발굴 결과 타원형의 석축 담장지 내에 3동의 건물지와 담장 외부를 둘러싼 수구가

동편 담장 외곽에서 확인됐다. 이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경주읍 전도》에 표현된

감옥과 그 위치 및 형태가 일치한다.

경주시 북성로 61.

 

 

순교자

 

♱ 복자 이양등 베드로 (李陽登 ? ∼18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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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양등 베드로 복자 - 김효애 그림>

 

이양등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래 성품이 선량한 그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 생활을 했다.

그 후 그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를 만나 신앙의 친구로서 가까이 지냈다.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베드로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잡혀 경주로 끌려갔다.

그는 경주 진영에서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했다.

이 베드로와 허인백, 김종륜 등 동료들은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나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 복자 김종륜 루카(金宗倫 1819∼18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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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김종륜 루카>

 

김종륜 루카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본관은 경주,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했다.

다시 언양 간월(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했다.

죽령 교우촌에서 그는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화목하게 지내며, 모범적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졸들의 추포(追捕)를 벗어나지 못해,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경주 진영을 거쳐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로 끌려나가

이양등, 허인백과 더불어 참수되었다.

 

 

♱ 복자 허인백 야고보(許仁伯 1822∼18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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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허인백 야고보>

 

허인백은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25세 때 천주교에 대해 듣고 입교,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허 야고보는 아내 박조이(朴召史)와 자식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고,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 극기와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했다.

50여 일을 갇혀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어, 8개월간 옥살이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울산의 죽령 교우촌으로 피신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허 야고보는 1868년, 체포되어 경주로, 다시 울산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이양등 회장, 김종륜 루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 박조이는 세 분 복자의 참수 현장까지 따라가,

시신을 거두어 장대 인근의 강뚝 아래에 매장했다.

박해가 끝난 뒤 유족들이 유해를 발굴,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뒤 도매산에 안장했다.

1932년 5월 유해는 월배동 감천리의 대구교구 교회 묘역으로 이장됐고,

1962년 10월 그 묘역 산상에 있는 성모상 앞의 석함에 옮겨져 안치되었다가,

1973년 10월 석함은 대구시 동구 신천3동에 있는 복자성당 구내로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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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관아>

 

 

 

 
  • 구달 2023.09.14 02:31
    마정, 아랫 글이 좀 이상한데...
    "허 야고보는 아내 박조이(朴召史)와 자식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고,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천주교인은 아내와 부부처럼 잠자리를 같이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는 아닌 듯 한데...
    하하하...
    kg59.or.kr 이 일년 내에 문을 닫으려 한다니 좀 안타까운 마음일세.
    건투를 비네. 구달
  • 마정 2023.09.14 15:32
    네, 그렇네요. 기독교 신앙 초기에는, 잘 모르는 게 많아서, 옳지 않거나 우수운 전례도 많았나 봅니다... 문을 닫더라도, 성지순례는 계속하겠습니다. 그때쯤 읽을 수 있는 카페를 고지할 예정입니다... 늘 고마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