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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문경 관아, 진안리, 여우목 성지

문경 객사 '관산지관'  (2).JPG

<문경 관아 터에 자리잡은 문경 서중학교 – 주흘산을 배경으로 한 남향 건물.>

 

문경 관아 성지

 

문경은 소백산맥 동쪽 사면에 조령(鳥嶺), 운달산(雲達山), 백화산(白華山), 주흘산(主屹山)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지대로, 갈래갈래 깊숙이 파인 골짜기마다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이 지역은 종 6품 문경현(聞慶縣) 현감(縣監)이 관장하였고

군사적으로는 경상우도(慶尙右道) 상주진관(尙州鎭管, 종3품 첨절제사 진영)에 속하는

종6품의 절제도위(節制都尉)가 파견되어 있거나, 현감이 겸직하였다.

경상우도(慶尙右道)는 조선 중종(中宗) 때 경상도를 양분하여, 북에서 남쪽을 보아 오른쪽,

즉, 지도상 서쪽에 속하는 여러 군(郡)을 통칭한 행정 구역이다.

 

문경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하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 지방 교우들이 고향을 버리고 찾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깊은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던 그들은 박해 때마다 포졸들에게 잡혀,

문경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으며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병인박해 때인 1866년 11월 18일(음 10월 12일)에는

여우목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회장 이윤일 성인을 비롯,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 큰 며느리 박 아녜스(공주에서 순교한 이 시몬의 처),

모친과 누이와 30여 명의 신자를 체포해 문경 관아로 압송했다.

<이윤일 성인에 대해서는 ‘81. 대구 계산동성당, 관덕정 순교 기념관 편’에 상술.>

 

관산지관(冠山之館)

     문경 객사 '관산지관'  (1).jpg       주춧돌.JPG

                                 <옛 객사 건물 관산지관>                         <‘관아 건물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아

                                                                                                  운동장에 있다.’는데,  남쪽 담 아래

                                                                                                  늘어선 이 돌들이 그 주춧돌일까?>

 

동헌을 비롯한 문경 관아의 건물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터는 이제 문경 서중학교 캠퍼스가 되었으나,

객사(客舍)였던 관산지관(冠山之館)의 일부가 보존되어

운동장 한편에 서 있다.

이 객사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인조 26년(1648년)과 영조 11년(1735년)에 중건(重建)된 기록이 있다.

박해가 심했을 때 감옥이 넘쳐 이곳에도 죄수를 가두었다고 전해진다.

 

‘관산’은 문경의 옛 이름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관산현(冠山縣)은 본시 관현(冠縣) 또는 관문현(冠文縣)인데

경덕왕이 개명했고, 지금의 문경현(聞慶縣)이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한국지명유래집 경상 편>

 

- 경북 문경시 문경읍 문경서중길 1 (상리 351) (문경서중학교)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진안리성지

진안리 성지.JPG

                                                             <진안리 성지>

 

문경읍 진안리(陳安里)는 영남의 관문 새재(조령 鳥嶺)와

충북 괴산의 이화령(梨花嶺) 고개 갈림길에 자리 잡고 있어

서울과 경상도를 잇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1821~1861) 와 칼레(Calais 姜 1833~1884) 신부 등

선교사와 교우들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2년 동안 매년 5,000~7,000리를 걸어 다니거나

말을 타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교우촌과

외교인들이 사는 반촌과 빈촌을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찾아다녔다.

마침내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도 매일 80~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 방문과 사목 활동을 하고, 그 이듬해인 1861년 6월

서울의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하러 가던 중

진안리의 오리티 주막에서 식중독에 걸린데다가 과로와 장티푸스까지 겹처

약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6월 15일 선종하고 말았다.

 

2002년 안동교구는 이곳 주막터를 매입해 성지를 조성했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92-6.

 

■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

진안리성지 야외 성전.JPG

                                               <진안리성지 야외 성전>

 

‘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문경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알려져 있지만

청주교구 진천군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경에서 발병한 최 신부가 말을 타고 배티 또는 진천군의 어느 교우촌까지

버티며 가서, 결국 그곳에서 선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문경 지역 내에서도 문경 새재의 주막이 있던 진안리와

문경 읍내 약국 이씨 집에서 선종했다는 전언도 있다.

 

 

이윤일 성인과 서치보 요셉의 여우목성지

여우목성지.jpg

                                                                               <여우목성지>

 

여우목 교우촌은 소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문경을 가르는 문경 지방 최동북단에 있다.

인근의 교우촌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는

산길로 불과 20~30리 거리여서, 세 교우촌은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여우목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으로, 상주 갈골에 살던 이윤일이 솔가하여

처가와 가까운 여우목으로 이주했다.

그의 처가는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박경화,

<‘80. 대구 경상감영-감옥 터-형장 터’ 에 소개함.>

복자 박사의 부자 집안으로 멍에목(청주교구 성지)에 살고 있었다.

<‘81. 대구 계산동성당, 관덕정 순교 기념관 편’에 기술.>

서치보 요셉 부자의 묘.JPG                이윤일 성인.JPG

                    <서치보 요셉 부자의 묘>                                                <이윤일 성인>

 

그 무렵,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손자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 가족도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여우목 교우촌으로 피난 옴으로써 많은 신자가 살기 시작했다.

 

함께 잡혀 온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와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이윤일 성인은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아들 이의서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고, 1912년 경기도 용인군 묵리(먹뱅이)에 살던

동생 이시영에 의해 다시 이동면 묵리 산으로 옮겨졌다.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 모셔진 뒤에, 성인의 유해임이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되었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되었댜.

 

 

 

명문 서치보 요셉의 집안

여우목성지 입구.JPG       여우목성지 (3).JPG

                   <여우목성지 입구>                                      <여우목성지>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은 여우목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력)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여우목 뒷산에 묻혀있던 서치보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장남 서인순 시몬(徐隣淳 1808~1868년)과 함께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성지에 모셔졌다.

 

부친이 별세한 후, 서인순은 어머니와 4명의 동생을 데리고 풍기로 이주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옮겨갔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

1868년 4월 29일(음력) 옥사했다.

 

한티에 피신했던 4남 서익순 요한(徐翼淳. ?~1868년)은 박해가 잠잠해지자

1867년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5남인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는 한실 교우촌으로 피난 갔다가

1867년 문경 포졸들에게 붙들려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명문 달성 서씨 집안은 1784년께 가톨릭에 입교했다.

20세 손인 서광수가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듬해, 첫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서광수는 문중에서 파적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후 손자 치보가 여우목으로 옮겨와 정착했다.

 

서치보 요셉의 손자가 대구의 거상(巨商)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독립협회 회원이며 대구교구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이다.

<81. 대구 : 계산동성당, 관덕정 순교 기념관…. 에 상술.>

 

서 아우구스티노는 병인박해로 대구 감옥에 갇혀 있는 삼촌 인순을 자주 방문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연명하는 삼촌을 보고,

갑부가 된 후에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았으며,

또, 봄가을 곡식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등

자선, 구휼 사업에 힘쓴 것도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라고 한다.

여우목성지 (3).JPG

                              <여우목성지-02>

 

여우목성지가 조성된 데는 서상돈의 증손자 공석 신부를 비롯한 후손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버려지다시피 했던 묘소를 찾아,

1999년부터 성지로 조성할 1,300여 평의 토지를 헌금으로 구입하고

서치보 요셉 부자의 묘소를 이장하는 등 성지 조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안동교구 홈페이지 등>

 

‘여우목’은 이 고개에서 저 고개로 넘어가는 좁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성지 주소는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