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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먹뱅이 교우촌 - 가은성당 – 마원성지 – 한실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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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은성당 성지>

 

병인박해로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문경 지방의 교우촌들은 거의 다 몰락했으나,

1869년경 가은 왕능리 먹뱅이에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됐다.

그 중심에는 방사선 요한이 있었다.

방 요한 집안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박해 때 부모를 잃은 방 요한은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로 피해 다니다가

문경의 산다리(東魯面 생달리)와 연풍 흰다리(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문지 마을

- 槐山郡 延豐面) 등지를 거쳐서 이곳 먹뱅이에 정착, 신자 7가구를 모아

자기 집에 공소를 열어 주일 첨례(瞻禮)를 보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공소 예절 시간에는 마장산 범바위까지 감시인을 보내 경계를 강화하기도 했고,

혹심했던 박해가 조용해지자 그는 점촌, 상주, 예천 지방 등으로 전교 활동을 다녔다.

그는 교인이나 외교인들 중 재산을 빼앗기거나 인권 침해를 당한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잘 처리해 주었으므로, 못된 관리나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외교인들 상당수를 입교시킬 수 있었다.

 

 

교세 통계표(1885~1886)에 의하면 대구 본당 초대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때, 신자 수가 69명이나 되었으며.

1896년부터는 김천 본당 김성학 알리스(金聖學 1870~1938) 신부가 와서 성사를 주었고,

1901년에는 김성학 신부가 기와집 한 채를 매입, 공소로 사용했다.

1907년부터는 도탄리(都呑里 현 왕능 王陵 4리)로 공소를 이전,

충북 옥천 본당에 편입되어 홍병철 루카 신부(洪秉喆 1874~1913)가 사목했다.

1922년부터는 점촌 공평 본당에 편입되고, 1941년 가은읍 왕능 1리로 공소를 이전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加恩) 저음길 69. 저음리 307)>

1957년 5월 28일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지인수 신부(Ernst Siebertz)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1961년 가은성당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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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은성당 성전>

 

알빈 슈미트 신부가 설계한 가은성당

 

아담하고 아름다운 가은성당은 알빈 슈미트 신부(Alwin Schmid 1904~1978)가 설계했다.

알빈 신부(우리 이름 안경빈)는 1961년부터 경북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건축 설계와 미술 작업을 했는데, 독일에 체류 중이던 1958년부터 포함하면

1978년까지 20년 동안 무려 185개에 달하는 한국 가톨릭 건물을 설계한 인물이다.

 

독일 남부 슈바벤(Schwaben) 지방 슈파이힝엔(Spaichingen)에서 태어난 알빈 신부는

1927년 뮌헨대학에 입학해 미술사를 전공했다.

또 베를린 프리드 빌헬름(Friedr Wilhelm)대학과 빈(Wien)대학에서 조형미술을 공부했다.

1931년 뮌스터슈바르작(Münsterschwarzach) 수도원에 입회, 이듬해에 첫 서원을 했다.

1936년 사제품을 받은지 1년 뒤 한국 선교사로 발령받아 북간도의 연길(延吉)교구에 파견돼,

용정 하시본당 보좌, 상시본당 주임으로 봉직했다.

1946년 공산군에 체포돼 남평(南平)과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었고, 1949년 독일로 추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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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빈 신부>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1958년 김천 평화성당을, 다음 해에는 문경 점촌동성당을,

1960년에 가은성당(1961.4~1961.11 건축)과 부산 분도 병원 성당을 설계했다.

이를 계기로 1961년 12월 한국에 돌아와 왜관 수도원에서 건축 설계와 미술 작업에 매진했다.

 

1964년 2월 『가톨릭 시보』에서 그는 “교회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 영원함과 무상함이

함께 만난다. --- 미사 예식을 위한 장려한 예배 공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면전에서 갖게 되는

기쁨, 슬픔, 고통의 인간적인 모든 관심사를 위한 고향이다. --- 일방적으로 한 측면만 강조되거나      과장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기여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디지털 김천 문화대전>

 

 

감실 아래에 모셔진 주보 성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1786. 5. 8. ~ 1859. 8. 4.)

성전 제단의 성 비안네 신부.jpg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02.jpg

        <성전 제단의 성 비안네 신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가은성당 감실 아래에는 주보 성인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 근교에서 태어난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는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여, 비밀리에 1794년 첫 고해를 하고 1796년에 첫영성체를 받았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 시기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고 살해되는 사건이 빈발했으며,

많은 사제가 정부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는 시절이었다.

비안네 가족도 미사 참례를 위해 먼 곳의 농장까지 몰래 다녀오곤 했다.

비안네는 부친의 농장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고, 정규 교육은 몇 개월밖에 못 받았다.

 

1802년 다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가톨릭교회도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

비안네는 1809년 나폴레옹 군대에 끌려갔다 온 뒤, 1811년 베리에르의 소신학교에서 철학을,

1813년에는 리옹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라틴어 등의 성적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퇴학당했다.

그러나 신심과 성품을 인정받아 1815년 그르노블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18년에 230여 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죽을 때까지 42년 동안이나 봉직하면서 주민들에게 열렬한 신심을 불어넣었다.

비안네 신부의 노력으로 아르스의 종교적 분위기는 일신되었으며,

그는 설교자와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1827년부터는 매년 2만여 명의 신자가 고해성사를 받으려고 찾아올 정도였다.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그는 하루에 16시간~18시간을 봉사해야 했으므로

하루 평균 두세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고, 1859년 결국 과로로 선종했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가 되고,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 되었으며,

1929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당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것은 모두 수도원에 잠시 다녀온 것이었다고 한다.

<위키백과. 가톨릭신문>

 

 

앙드레 부통 신부가 그린 벽화

앙드레 부통 신부.jpg    부통 신부 작-겟세마니 동산의 예수.jpg   부통 신부의 벽화-02.JPG

    <앙드레 부통 신부>       <부통 신부 작-겟세마니 동산의 예수>     <부통 신부 벽화-02>

 

가은성당 성전에는 ‘붓을 통해 신앙을 전파한’ ‘떠돌이 화가’ 앙리 부통 신부가 그린

4점의 성화 벽화가 있다.

 

부통(Andr Bouton OSB 우리 이름 부보경 1914~1980) 은 프랑스 지엥에서 태어나,

고향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를레앙 대신학교에서 2년간 철학을 공부했다.

튀니지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1934년 프랑스 북부의 위스크 대수도원에 입회,

1936년 6월 29일 수도 서원을 하고, 1940년 2월 25일 사제품을 받았다.

 

1949년 5월 8일 위스크를 떠나 모로코, 알제리의 수도원에서 지내며

여러 교회의 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1956년부터 1년간 위스크에 돌아왔다가 예루살렘으로 떠나

1962~1963년 도미니코회의 예루살렘 성서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시나이반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여러 성당에 벽화를 남겼다.

부통 신부의 벽화-03.jpg                  부통 신부의 벽화-04.JPG

       <부통 신부 벽화-03>                          <부통 신부 벽화-04>

 

이후, 1964년부터 10여 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전국적으로 벽화 작업을 통한

예술 선교 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베트남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벽화를 그렸다.

 

1970년대 중반 일본으로 떠나, 건강 악화로 짧은 체류를 마치고

1977년 위스크 수도원에 복귀했으나, 1980년 3월 10일 뇌출혈로 쓰러져

이틀 뒤인 3월 12일 릴(Lille) 시립병원에서 선종했다.

 

그는 미술대학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열두 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도회 입회 후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께 봉사하는 데 쓰겠다는 소명을 지니고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남겼다.

‘언젠가 예술가가 되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닐 것’이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결심대로 ‘떠돌이 화가’가 되어 한세상을 살았다.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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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은성당의 사명 선언문 - 기쁘고 멋있게!>

 

가은성당에서는 6명의 성직자와 9명의 수도자가 배출되었다.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대야로 2491-4 (왕능리 280-1)

 

먹뱅이교우촌은 성지로 지정되었지만, 성역화 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로서는 순례지로 적합하지 않다.

 

 

‘먹뱅이’의 이름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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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뱅이교우촌>

 

우리나라에는 여러 곳에 ‘먹뱅이’라는 지명이 있다.

먹을 만드는 먹방이 있어서 묵방(墨坊)이라고 한 데서 변형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나,

대부분의 ‘먹뱅이’는 ‘묵은 배미’가 변이된 말로서 ‘농사를 짓지 않고 묵히는 농지’를 뜻한다.

‘먹뱅이’를 한자로 ‘묵방리(墨房里)’라 쓰다 보니 먹과 관련된 유래가 생겨난 것이다.

 

‘배미’라는 것은 ‘논농사를 짓는 한 덩어리의 땅’을 뜻하는 말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옛날에는 농민들이 아주 빈번히 쓰던 용어였으며, 높은 배미, 낮은 배미,

큰 배미, 작은 배미, 긴 배미 등이 지명으로 쓰인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농촌에서 여러 사정으로 농사를 포기하고 묵밭, 또는 묵은 논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에

‘묵은 배미’가 자연스럽게 땅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상준의 지명 이야기>

 

 

마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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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원성지>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험준한 고갯길 새재 남쪽으로 30여 분 거리에 위치한

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원 1리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문경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 교우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이 지역은 깊은 골짜기들이 많아서, 문경, 한실, 여우목(狐項里), 건학, 부럭 등

여러 곳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었다.

 

당시에 경상도 북부 지역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칼레 신부는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 중허리의 한실 마을에

 신자들이 서너 집씩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벌어지자, 이곳에 숨어 살던 교우 40여 명이 붙잡혀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는

깊은 신심과 성실한 생활 태도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칼레 신부에 대한 헌신과 두터운 우정이 알려져

마원이 성지가 되는 기틀을 이루었다.

 

 

칼레 신부(Calais, Alphonse 姜 1833~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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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레 신부>

 

‘경북의 사도’라 불리는 칼레 신부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1860년 7월 5일 사제가 되어 1861년 4월 7일 조선에 입국,

1866년까지 5년간 경북 서북부 지역에서 사목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수많은 체포 위기를 넘기고, 한실 부근 산속에 숨어있다가

10월 페롱 신부(Feron 權)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

여러 차례 재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지병이 악화해,

프랑스로 귀국, 수도사로 봉직하다가 1869년 선종했다.

 

칼레 신부는 박상근 마티아의 집에 숨어 살다가, 포졸들의 발길이 다가오자

둘이서 한실교우촌으로 도피하던 이야기를 파리 외방선교회에 보고했는데,

당시의 신도와 신부, 또는 칼레와 박상근의 뜨거운 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한실 뒷산까지 이제 20리 정도,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소. 마티아는 너무 지쳤으니

  마을로 내려가서 먹을 것을 얻으시오.”

‘제가 신부님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도 포졸들이 습격하여 폐허가 되었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은신할 곳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신부님을 못 떠납니다.

  신부님이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함께 죽겠습니다.’

 

저와 마티아가 서로를 위해 말다툼할 때, 저 헌신적인 마티아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동행할 기력이 없는 마티아를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이번만은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티아, 내 말대로 하시오. 명령입니다. 당신이 가져온 마른 과일 절반은 가져가고,

  나머지 절반은 내게 주시오. 제발 순명하시오!”

 

그러자 그는 저를 쳐다보며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저도 마음이 짓눌려 참을 수가 없어서 그의 손을 붙잡고 같이 울었습니다.

몇 마디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저는 혼자 떠났습니다. 한참을 갔는데도

마티아는 그 자리에서 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복자 박상근 마티아(1837~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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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근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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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근 마티아의 묘>

 

문경 토박이로서 아전이었던 박상근은 충청도에서 숨어든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입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며 살았고,

관청에 근무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고

비신자가 사망하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었다.

 

칼레 신부에게 성사를 받으면서, 신부를 헌신적으로 보살폈으며,

한실교우촌에 은신하던 신부를 문경 자기 집으로 모셔와 숨겨주었다.

칼레 신부와 헤어진 뒤 결국 병인년 12월에 체포된 그는

친분이 있었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복자품에 올랐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발굴된 것은 1985년 9월의 일이다.

마원리 박씨 문중 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됐다.

안동교구는 이곳에 순교 성지를 조성, 칼레 신부와 마티아의 우정을 기리고 있다.

성지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599-1

<마원성지 홈페이지. 성인 목록>

칼레 신부와 박상근 마티아.JPG

                                                        <칼레 신부와 박상근 마티아>

 

마원리(馬院里)

 

조선 시대 마포원(馬包院)이 있어서 ‘마포원’, ‘마원’ 또는 ‘마판’이라고 불린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동면 우어리 일부를 병합해 ‘마원리’라 하고

문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지 목록>

 

마원은 고려 초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항상 말을 많이 길러 두었다가 출장 관리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라 하여

마원 또는 마판이라 부르게 되었다.

<두산백과>

 

 

문경 한실교우촌 성지

 

한실교우촌은 칼레 신부가 백화산을 넘어 문경, 연풍 등을 다니며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목의 중심지였다.

병인박해 때에는 이곳에서만 15명이 체포되어 순교했다.

 

백화산 서북부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뒷산을 넘으면 바로 충북 괴산군 연풍에 이른다.

좌편에 뇌정산(991m), 우편에 문경 새재와 조령산(1107m)으로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요새의 특성을 갖추었기에 임진왜란 때 피난처가 되었고

박해 시에 은둔처가 되어 신유박해 때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병인박해로 많은 신자가 이곳을 떠나, 1910년 국권 침탈 이후에는

마을이 전부 폐허가 되었고, 대신 먹뱅이와 도탄 등에 새 신자촌이 생겼다.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순교자 현양 사업에 본격 착수한 안동교구는

2009년 9월 12일, 병인박해 당시인 1865~1866년 경북 상주 감옥에서 순교한

서유형 바오로의 유해를 발굴, 문경 한실교우촌에 이장하고 성지를 조성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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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실교우촌 입구 나실마을>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고 또 올라가, 드디어 한실성지 입구인 나실마을에 도달했다.

안내판 옆에 ‘성지순례 오신 분은 아래 번호로 전화’ 하시라는 고지가 붙어있다.

담당 성당인 것 같다.

전화를 하니, ‘사정상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나중에 다시’ 오시란다.

마을 주민들과 어떤 문제가 있어서 주민들이 길을 막았다는 말을 다른 데서 들었다.

어서 해결되어 이곳 순교자들에게 인사할 수 있기를...

순례 가실 분은 문경성당에 먼저 문의함이 옳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