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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상주 관아, 옥 터 - 배모기 - 신앙고백비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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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관아 터 – 현 왕산 역사공원>

 

소백산맥 동편의 경북 상주(尙州)는 그 동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살기 좋은 땅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부락을 이룬 유서 깊은 고장이다.

고려 때 전국 8목의 하나로 상주목이 설치되었고

1407년 조선 태종 7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상주가 경상도의 수부로서

경주시(慶州)와 함께 경상도(慶尙)의 어원을 이루었다.

 

1700년대 실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주축이었던 남인 학자들에 의해

천주교가 처음 상주 지방에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격적인 신앙은 1785년 3월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 집의 신앙 집회 때 일어난

을사추조적발 사건의 연루자로 문중에서 파적(破籍) 당한 서광수의 가족들이

상주 지방의 이안면 배모기로 은거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1798년에는 황사영이 상주의 이복운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무렵 전교 노력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상주 관아 성지 홈페이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광수의 아들 서유도 가정은 문경 한실로 이사 가고

이곳의 신자 이응동의 선대 가정이 천주교를 이끌었다.

이후 배모기 부근의 사실과 저음리, 멍에목, 앵무당, 삼막터, 오두재,

보문, 서산 화형 터와 율리(밤밭) 등 여러 곳에 신자 촌이 생겼다.

1801년 신유박해,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박해 때마다 문경, 상주 등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상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다 사망하거나,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당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멍에목, 앵무당 등에서 체포된 박보록 바오로,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안군심 리카르도 등 31명의 신자가

상주 진영으로 잡혀 와 문초를 받은 후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문경의 여우목과 한실공소, 모전 등 여러 곳의 신자들이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순교했으며,

성 이윤일 요한과 한실공소 김 회장 형제 및 청리면 질리 사람 송아기가

상주를 거쳐 대구감영으로 끌려가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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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역사공원>

 

상주의 경상감영은 조선 선조 26년(1593), 성주로 옮기면서 폐쇄되었고

건물은 1914년 일제가 구획정리를 목적으로 상주성과 4대문을 없앨 때

대부분 함께 철거됐으며, 그전에 옮겨졌던 일부가 살아남아

2021년 조성된 상주 경상감영공원 (상주시 삼백로 323. 복룡동 161-96)에

다시 세워지거나, 새로이 복원되어 상주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상주시 중앙의 왕산 아래에 있던 감영 터에는 왕산 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

상주시 서성동 163-48.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족의 침입을 피해 이곳에 머문 일이 있어서

이 자그마한 동산의 이름이 왕산(王山)이 되었다고 한다.

 

상주 옥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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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감옥 터 성지>

 

1408년 경상감영이 상주에 있을 당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상주 감옥은

상주 읍성 남문 앞에 세워져, 1912년까지 원형을 유지했으나,

일제가 남문을 철거하면서 감옥도 없애버렸다.

 

박해 시기에 상주와 인근 지역에서 체포된 교인에게 고문을 가하고

많은 교우가 피를 흘린 통한의 땅이다.

안동교구 첫 번째 복자인 박상근 마티아도 1867년 1월 이곳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 연재 ‘85. 먹뱅이교우촌, 가은성당, 마원성지’에 상술.

   안동교구 마원성지 홈페이지에는 1866년에 처형으로 돼 있으나,

   가톨릭 성인 목록 등은 1867년으로 명기했다.>

상주 옥 터 경당.jpg       상주 옥 터 성모 동산.jpg

                                      <상주 옥 터 경당>                                <상주 옥 터 성모 동산>

 

안동교구는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이곳을 성지로 지정했다.

상주시 성동동 남문시장 옛 소전골(소廛. 소를 사고파는 시장.)로

지금은 청과물시장이 들어서 있고, 그 한편에 경당과 성모 동산, 14처 등이 조성돼 있다.

경북 상주시 남문2길 89-15 (성동동 633-2)

 

 

배모기교우촌 성지

배모기 마을.jpg       서광수, 서유도 내외의 묘소.jpg

                         <배모기 마을>                                      <서광수, 서유도 내외의 묘>

 

조선 천주교회 창립 후 첫 박해 때부터 형성된 배모기교우촌은

서광수(徐光修 1715∼1786)와 그의 다섯째 아들 서유도(徐有道) 가족이 입향(入鄕)하면서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주민이 믿음의 형제가 되었다.

서광수는 용인 현감을 지낸 서명함의 장남으로, 그의 집안은 누대로 내려오는 명문 대가였다.

그의 아들 6명이 모두 천주교에 입교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차남 유오(有五)와 5남 유도(有道 1772∼1837) 집안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그의 후손들은 경상도 지방의 복음화에 크게 힘썼고, 순교자가 4명이나 나왔다.

 

대구본당과 대구교구 설립 초기에 그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헌신하였고

조선 및 대한제국의 민족 운동가였던 서상돈<이 연재 ‘81. 대구 계산동 성당 ---’에 상술.>이

서광수의 현손(玄孫 : 증손자의 아들. 고손-高孫과 동의어.)이다.

 

서광수는 입촌 이듬해인 1786년 타계했고, 유도 가족이 몇 년간 살며 복음을 전파하여

부근 여러 마을이 교우촌을 이루게 했다.

서유도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문경 한실로 피난을 갔다.

배모기 마을 실개천을 앞에 둔 야산 어귀에는 서광수와 5남 서유도 내외의 묘소가 있는데

1996년 성역화되었다.

 

상주시 이안면(利安面) 양범2길 20(良凡里)인 배모기의 이름은

지형이 뱀의 목처럼 생겼대서 붙여졌다.

 

 

신앙고백비

신앙고백비.JPG

                                                                       <신앙고백비>

 

상주시 청리면(靑里面) 삼괴2리(三槐2里) 석단산(石壇山) 아래 안골짝의 쌍바위 중

오른쪽 큰 바위 위에 한국 천주교회 유일의 신앙고백비가 서 있다.

이 마을에 살던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 중 차남인 김삼록 도미니코(金三錄)가

비용을 거의 다 들이고 비문을 손수 새겨서 건립한 것이다.

 

박해 중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니던 김 도미니코(1843∼1935)는

한불 조약 이후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할 무렵인 1894~1900년 초에

김해 김씨 문중 집성촌의 자기 집 뒤 큰 바위 위에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높이 127㎝, 폭 39㎝, 두께 22㎝의 이 비석을 세웠다.

직사각형 비석 몸체와 십자형을 하나의 화강암으로 깎아 세우고

그 위에 우리의 전통적인 둥근 갓을 얹은 정감 있는 모습이다.

 

앞면의 비문 내용은

第一 天主恐衛咸    (제일 : 천주 공위함)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제이 : 교화황위함)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제삼 : 주교위함)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父)衛咸 (제사 : 신부위함)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五 敎于(友)衛咸 (제오 : 교우위함)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

奉敎人 金道明告                                    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癸卯生 本 盆城 金(金海)                         계묘년(1843) 생, 본관은 분성(현재 김해) 김씨이다.

 

후면에는 그의 가계(家系)를 적어 넣었다.

 

김삼록이 이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에도 지방에는 아직 사사로운 박해가 남아있었으므로

비석 앞에 미루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를 많이 심어서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도록 가려 두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이 모든 나무를 베어 버려서 앞이 훤히 트였다.

 

1980년대 안동교구가 교회 사적지 개발을 위해 신앙고백비 주변 부지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1999년 성역화를 추진, 대형 십자가와 제대, 십자가의 길 14처를,

2000년에는 대희년 상징 조형물 등을 설치했다.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361 (석단문 옆)

신앙고백비 성지.jpg

                                                  <신앙고백비 성지>

 

 

  • 구달 2024.01.07 07:19
    감명 깊게 읽고 가네.
    새해에도 평화와 건강이 같이 하시기를 비네.
    구달 드림
  • 마정 2024.01.07 08:58
    늘 격려해 줘서 고맙네. 새해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고, 좋은 사진 많이 남기기를 기도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