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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아름다운 상주 사벌 퇴강 성당 - 앵무당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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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벌 퇴강성당>

 

 

삼국시대, 현재의 상주시 일대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서부와 충청도 동부 지역에

사벌국(沙伐國), 사량벌국(沙梁伐國) 또는 사불(沙弗)이라 불리던 나라가 있었다.

신라에 복속되었던 사량벌국이 갑자기 배신하여 백제에 귀속하자,

이사금 석우로(昔于老 재위 247 ~ 261년)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정복하고 주(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이사금은 치리(齒理)라는 뜻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성스럽고 지혜롭다는 옛말에서

  유래하여, 신라 3대 유리왕에서부터 18대 실성왕 때까지 왕의 명칭으로 썼다.

- 삼국사기, 삼국유사. >

<위키백과>

오늘날 상주시 사벌국면 명칭의 유래이다.

 

이 사벌국면,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아름다운 퇴강성당이 서 있다.

퇴강(退江)의 옛 이름은 ‘낙동강변에 있어 물이 흔하다.’라고 하여

물미(勿味)였다가 퇴강 또는 퇴하(退河)로 바뀌었다.

거창 유씨(劉氏) 마을이었던 이곳에 1625년 김해 김씨가 이주해 와서

유씨를 부인으로 맞고 일가를 이룬 뒤 가세가 변칭하여 김해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퇴강 성당 성전.JPG

                                                      <퇴강성당 성전>

 

20세손인 김현영이 문경을 왕래하다가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1865년부터 성서와 교리서를 사서 공부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김현영은 세례를 받고자 했으나 당시에 진행된 병인박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95년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자손들에게 천주교를 믿게 하여

1899년 김운배 호노리오, 김종록 클레멘스, 최면집 마르티노가

가실 본당(佳室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서 세례를 받았다.

김현영 베드로는 드디어 1903년 세례식 날짜까지 정해졌으나

한 달을 남기고 중병에 걸려 무산되어, 대세(代洗)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사이 신자가 급속히 늘어나 190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

1922년 9월 22일 본당으로 승격되고, 1924년 십자형 성당이 건립됐다.

1957년 8월 25일 산 아래 낙동강 가까운 마을 입구에 새로운 성당을 준공했으나

이농으로 주민 수가 줄어들어 1968년 안동교구 함창 본당 관할 공소로 예속되었고

2003년 7월 11일에는 퇴강공소와 사벌공소를 합쳐 준본당이 되었으며

2007년 7월 11일 사벌 퇴강성당으로 승격됐다.

천주교 요람지.jpg       봉도전교 백주년 기념비.jpg  

                         <천주교 요람지>                                     <봉도전교 백주년 기념비>

 

 

사벌 퇴강성당은 상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 교당으로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성당 마당의 ‘천주교봉도전교백주년기념비(奉道傳敎)’에는

첫째, 자발적으로 책을 구해 읽고 스스로 종교를 받아들인 곳,

둘째, 성당을 자발적으로 건축한 곳.

셋째, 사제와 수도자를 45명 배출한 곳’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 퇴강성당 출신의 사제는 40여 명, 수도자가 15명으로

명실공히 경북 북부 지역 신앙의 산실로 평가되고 있다.

성당 위치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물미길 8 (퇴강리 398)

<사벌 퇴강성당 홈페이지, 상주시청 홈페이지>

 

 

낙동강 7백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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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7백리 기점>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영양에서 시작된 반변천이 안동에서 합쳐 흐르다,

봉화 영주 예천에서 오는 내성천과 예천 삼강에서 만난다.

또 다른 물줄기는 문경 초점이 발원지인 조령천과 영강으로 내려오다

바로 여기 퇴강 즉 상낙(上洛. 상주-尙州의 옛 이름)의 동쪽에서

안동에서 오는 강물과 합수하여 남해안으로 흘러간다.

즉 낙동강은 '상낙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 하여 '낙동강'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여기서부터 낙동강 하구둑까지 낙동강 칠백 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상주의 다른 이름은 낙양(洛陽)이라고 씌어있다.)

<낙양은 중국 허난성의 도시로, 동주와 후한, 육조 시대의 옛 수도이다.

   - 위키백과>

 

‘퇴강’이라는 명칭은, 낙동강을 비롯해 문경·화령·예천 등지에서 흘러온

여러 강줄기가 마을 앞에서 만나는 바람에 강물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앵무당 교우촌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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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당 터>

 

속리산 남쪽의 지맥인 구병산(九屛山 876m) 주위는 골이 깊어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 많은 신자가 피신해 와 여러 교우촌을 이뤘다.

최양업 신부의 사목 순방지였던 멍에목 교우촌(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 310)과

이윤일 성인의 피신처였던 갈골 교우촌(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능선 남쪽이

앵무당 교우촌(鶯舞堂.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 산 109 化南面 坪溫里) 자리이다.

이곳에 꾀꼬리가 춤추는 형국의 묘터가 있었다는 말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 이름이 앵무(鶯-꾀꼬리 앵 舞-춤출 무)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앵무동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유박해 이후 첩첩산중인 이곳 앵무당과 멍에목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815년 을해박해 때 백부인 김강이 시몬은 원주에서 순교하고,

부친 김 다태오는 귀양을 가고, 나이가 어려 석방된 김사건 안드레아는 앵무당에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포교 활동을 하여 영남도 회장이 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김 안드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13년간을 더 감옥에서 살다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디.

 

박경화 바오로, 박사의 안드레아 부자도 정해박해 때 상주 포졸들에게 붙잡혀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박경화 바오로는 옥사하고,

박사의 안드레아는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박 안드레아의 아들 소랑(사도 요왕), 딸 모정과 모열은 나이가 어려서 석방되었는데

아들은 문경 여우목으로 이주했다가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했다.

 

이재행 안드레아도 김사건 박사의와 함께 참수되었다.

<김, 박, 이 세분 복자에 대해서는, 이 연재 ‘81. 대구 계산동성당---’ 편에 서술됨.>

 

충남 보령 출신으로 앵무당에 정착한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는,

세분 복자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835년에 대구 감영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 연재 ‘80. 대구 경상감영’ 편에 서술.>

 

정해박해 때 앵무당에서 체포된 신자는 30여 명에 이른다.

 

 

앵무당 왕소나무

왕소나무.jpg

                                                <왕소나무>

 

신자들이 잡혀가 초토화된 앵무동에는 1800년대 중반부터 동학교도들이 숨어 살다가,

동학혁명이 진압된 후에는 화전민이 들어와 살았다.

1976∼77년 화전민 이주 정착사업이 진행되면서 마지막 20여 가구가 떠나고

앵무당은 흔적없이 사라져버렸고. 노송 한그루 만이 홀로 서 있다.

높이 20여m, 둘레 4.2m의 거목으로, 수령 5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앵무당교우촌은 성지로 지정은 됐으나 아직 성역화 작업은 첫 삽을 못 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