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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용서에서 만나는 성선설과 성악설

2012. 9. 26.

 

공자(孔子)는 ‘성(性)이란 하늘이 사람에게 준 것’이라고 갈파했습니다.

중용(中庸)에 나오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이라는 구절입니다.

공자가 알았던 몰랐던 간에, 그가 쓴 ‘하늘’이 가톨릭의 ‘하느님’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맹자(孟子)는 성(性)이 하늘에서 준 것이므로 착할 수밖에 없다고,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자비를 베푸는(측은지심 惻隱之心) 인(仁),

부끄러움을 아는(수오지심 羞惡之心) 의(義),

겸손한 마음인(사양지심 辭讓之心) 예(禮),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시비지심 是非之心) 지(知)를 갖추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비하여 순자(荀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누구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좋은 목소리와 예쁜 용모를 탐하는 성향이 있다.’며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했습니다.

 

 

성선설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선한 본성을 받고 태어났으나,

세상을 살면서 온갖 나쁜 일에 빠지기 쉬우므로,

배우고 자신을 수양해서 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고,

 

성악설은 ‘사람이 태어난 대로의 악한 본성에 따라 산다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가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법으로 교화하고 교육으로 선도하면

예(禮)의 세세한 조리에 합당하게 되어 천하는 질서 있게 된다"는 주장으로,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방법이나, 그 결과에 있어서

두가지 설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사람을 이 두 가지 설로 규정짓지 않습니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18:3) 의 말씀은 성선설을 연상시키지만,

우리 모두가 원죄를 안고 태어났음을 보면 성악설에 기반하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지었건,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었던 간에

예수님께서는 회개만 하면 용서해 주셨습니다.

 

바리사이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을 때, 그 고을의 죄인 여자가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입을 맞추고 옥합에 든 향유를 발라드립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며

그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루카 7,36-50)

 

울고, 발을 닦아드리고, 입 맞추고, 향유를 바르는 행위는,

죄를 진 사람이 속죄받기위하여 진심으로 뉘우치는 과정을

비유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면

하느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의 입장에서는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어서

용서를 안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회개할 때까지 단죄를 미루고,

스스로는 늘 잘못이 없는지 돌아보고,

용서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회개하고 고쳐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