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3388 추천 수 0 댓글 0

 

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99 가톨릭의 사회 참여

 

마누라가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서 유기농 야채 좀 사 와요.’

남편이 슈퍼에서 호박이랑 오이를 집어보니

아무래도 유기농이 아닌 것 같은 의심이 들어 점원에게 물었다.

“이 채소에 혹시 독극물이 묻어있지 않은가요? 오늘 저녁에 마누라가 먹을 건데.”

 

점원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선생님, 그런 건 직접 뿌리셔야지.’

 

 

☺☺☺☺☺☺☺☺☺☺☺☺☺☺☺☺☺☺☺☺☺☺☺☺☺☺☺☺☺☺☺☺

 

 

 

종교의 사회참여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다.

사회에서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합의에 가까운 결론이 나 있는 문제에의 참여는

어렵기는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

예컨대 3공 독재, 유신이나 5공 때의 민주화운동은

거의 모든 국민이 찬성한 것이므로 용기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서고

국민이 따라줌으로서 결국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뜻이 갈려 있는 경우, 특히 다른 생각들의 비율이 비슷한 경우,

종교가 한 쪽 편으로 방향을 정하고 그리로 움직인다면,

필연적으로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을 것이다.

최근의 이슈로는 남북화해, 4대강 사업,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등이 이에 속한다.

 

 

특정 종교에서 방향을 정했다 하더라도 그 신자들이 전원 이를 따르지는 않는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얽히므로 일치된 결론은 도출될 수 없기 마련이다.

어떠한 문제에는 종교가 참여하고, 어떤 문제는 손대면 안 되는 지도

칼로 자르듯이 구분되지는 않는다.

 

종교단체들의 빈번한 사회참여에 대해서 ‘종교인들이 왜 저런 데 까지 소리를 내나?’ 하는

비난도 쏟아진다.

전혀 다른 반응으로, 아예 특정 종교를 기저로 하는 정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가톨릭의 사회참여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한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예수는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살면서,

차별받고 억압받고 외면당하였던 보잘것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느끼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하느님의 왕국’으로 변화시키려고 복음을 선포하며 도전하다가

반대자들의 음모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가톨릭은 단순히 자기 개인의 마음의 평화,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만이 목적이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아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을, 억압받는 이들에게 정의를,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수많은 민족들이 존중을 받게 하는데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5항)

 

 

가톨릭의 사회참여는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재화를 공동 소유로 하여 가난한 이들을 없앤 데서 출발하여

수도자들이 땅을 경작하고, 교육기관, 병원, 보호 복지 시설, 자선단체를 세워,

궁핍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19세기에는 세계가 전혀 새로운 면모를 나타냈다.

소비재 생산을 위한 새로운 사회 구조, 사회와 국가와 권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

노동과 소유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함에 따라 계급간의 반목과 갈등이 증폭되어 갔다.

자본가들의 부는 급속도로 축적되었으나, 산업 저변의 무산 계층 노동자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경제적, 사회적 모순과

잘못된 사회 구조에 대하여 더 이상 간과하거나 침묵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현대 가톨릭교회의 첫 사회교서인 “새로운 사태”를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점차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어 왔다.

  --- 생산과 상업이 소수에 의해 독점 장악되어 극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이

  가난한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노예의 처지와 다름없는 멍에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

사회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과 반목을 극대화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폭력을 가져왔으므로

레오 13세 교황은 “새로운 사태”의 사회적 가르침을 통하여

합리적이고 복음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인체에서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일치하며 균형 잡힌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국가도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균형을 유지하여야 한다.

  화합이 만사를 아름답고도 질서정연하게 만드는 반면에

  끝없는 반목은 혼란과 잔혹만을 조장할 뿐이다.”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진리 안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교황들은 무려 20여 편의 교황교서를 발표하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와 관련하여 복음의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를 선포하여 왔다.

이 모든 사회교리가 집대성되어 2004년 “간추린 사회교리”가 발표되었다.

 

 

한편,

‘하느님이 창조하신 땅과 그 자원, 자연계 전체는

 온 인류가 공동 관리하도록 맡기신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모든 인간이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책임이 있다.

 ---이 지배권은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이웃에게 쾌적한 생활환경을 물려주려는

 배려로 제한을 받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인간은 존재와 성장보다 소유와 향락을 더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그리고 무절제하게 땅의 재원과 자신의 생활을 남용한다.

  노동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그 노동이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사물들의 원초적 선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마치 땅에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원초적인 형태나 목적이 없는 것처럼,

  제한 없이 자의로 사용하고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고, 자연을 다스리기보다는 학대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백주년”)

 

 

“교회는 피조물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신 선물인

  땅과 물과 공기를 보호하고, 무엇보다도 인류를 자멸에서 구해내기 위해

  공공생활에서 그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 의무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제43차 평화의 날 담화’)

 

 

지속적으로 자연 파괴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의 환경을, 임기가 제한된 각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장기적인 안목에 눈 감은 채 급격히 파괴시키는 것을 경고한다.

 

 

자연보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 사용하고 얼마만큼 남겨 놓을 것인가 하는 데에

견해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른 사회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옳고 그름이 명백한 것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엇갈리는 이해 가운데서

한 쪽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찬반 논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무서워서 침묵하고 있던 독재체제를 타파하기 위해서

독재자를 설득하려 노력하고, 안 되자 목숨을 걸고 체제 전복에 앞장선 일은

전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국민의 생각이 분열된 일에 대해서, 또는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제들에 대해서

자주, 너무 큰 소리를 내거나, 행동으로 나섬으로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또는 심지어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서조차 외면당하는 일이 없지 않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가톨릭으로서의 원칙을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데 까지만 가면 어떨까?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