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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81 초기 평신도 지도자 정하상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정약용(丁若鏞)의 셋째형 정약종(丁若鍾)은

큰아들 철상(哲祥)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했다.

 

정약종의 부인 유조이(柳조이 세실리아)와 여섯 살이었던 둘째 아들 하상(夏祥 바오로)은

옥에 갇혔다가 석방됐다.

 

1795년 경기도 양근의 분원(分院 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나 자란 하상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산이 몰수되어 집안이 기울자 모친, 누이동생 정혜(情惠)와

마재(馬峴 - 경기도 楊州郡 瓦阜面 陵內里 마재부락)의 큰댁으로 이사해

친척들에 의지해 살았다.

 

 마재성지-02.png

 

<팔당 마재성지> 

 

 

어머니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하상은 20세에 단신 상경, 조선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 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수년 간 교리와 학문을 익히고 서울로 귀환했다.

 

그는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순교하여 성직자가 없는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다시 파견해 주도록

북경 주교(北京 主敎)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을 시작했다.

 

이 어려운 일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하상은 북경에 가서 직접 신부 영입을 시도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그 역관을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북경에서 영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다.

 

 

 정하상 북경왕래-01.jpg

 

 

 

 

1816년 이후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청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으로 파견할 수 없었다.

 

북경에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했다.

<변문(邊門)은 조선의 국경도시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別定所)가 있어 의주 관리들이 파견돼 상주하던 곳이었다.

  옛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명이나 청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관문이다.

  목책을 둘러쳐서 책문(柵門)이라고도 하고,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이라고 부른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와 교섭을 계속했다.

 

북경주교를 상대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하상은 1825년 로마교황청에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고,

이는 북경주교를 통해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를 거쳐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1931년 9월 9일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가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Brugiere) 주교를

교구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1834년 말에는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하였다.

 

조선교회는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제대로 된 교회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하상은 앵베르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순방했다.

그의 정열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는

그를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베르 주교와 정하상이 순교함으로서

조선 최초의 성직자가 되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정하상의 집에서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투옥했다.

하상은 참혹한 고문을 견디며 배교를 거부하였고,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끝까지 불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는 자수하여 순교했다.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유진길과 함께 사형 언도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해 순교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두 달 뒤 79세의 노모도 옥사하였고, 다음 달에는 누이동생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하상은 체포되기 전에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저술했다.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주장한 글로서 3644자로 이뤄진 짧은 내용이지만

명쾌한 논리로 조선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천주교의 효론(孝論)을 바탕으로 제사폐지 문제를 극복하면서

동양의 윤리관을 존중하려고 고심하는 등, 전통사상과의 합일

또는 교리의 토착화에 착안하는 예지를 보여주고 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하상 바오로의 축일은 9월 20일이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