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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66

가톨릭과 옹기쟁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고미술 전문가가 조그만 식당 앞에서 발을 멈췄다.

털 빠진 엉성한 고양이 한 마리가 헌 오지그릇에서 우유를 핥아먹고 있었는데,

그 오지그릇이 훌륭한 골동품이었던 것이다.

전문가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말을 붙였다.

‘저 고양이 파슈. 2 달러 드리리다.’

주인이 대답했다.

“저 고양이는 파는 게 아닌데요.”

전문가가 다시 말했다.

‘여보, 저 고양이는 털이 빠지고 볼품이 없는데 팔지 그래요, 내 10달러 내지.’

주인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탐이 나면 가져가슈.”

주인은 10달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에는 전문가가 활짝 웃으며 제안했다.

‘덤으로 저 더러운 오지그릇을 가져가도 되겠지요? 고양이 우유 그릇으로 쓰게요.’ 

그러자 주인이 정색을 하고 되받았다.

“어림없는 소리 마슈. 저 썩은 오지그릇 덕에

 비루먹은 고양이를 서른네 마리나 팔았는뎁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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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甕器)였다.

우리나라 가톨릭의 상징의 하나이며,

집안의 내력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옹기를 아호로 삼은 것이다.

김 추기경은 “옹기는 가톨릭이 박해받던 시대에

선조들이 산속에서 구운 뒤 내다팔아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자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 이라고 설명한 일이 있다.


김추기경의 조부 김보현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가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했다.

조모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돼 부친 영석을 낳았다.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1895년경 경상도 칠곡군 칠곡군 장자골 옹기굴 신자촌에서

서중하와 혼인, 정착했다.

대구 선산등지로 전전하던 김영석 집안은

김추기경 다섯 살 때 경북 군위로 이주,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생계를 이어갔다.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으로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은

이렇듯 대부분 옹기나 숯을 구워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산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흙과 목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옹기를 짊어지고 팔러 다니면서 천주교를 알렸다.

옹기장수나 옹기점 주인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사영(黃嗣永)을 굴속에 숨겨주었다가 잡혀서

1802년 충청도 홍주감영(洪州監營)에서 목이 잘린 김귀동(金貴同)은

충청도 청양(靑陽) 고산(高山) 출신으로 신유박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 배론(舟論) 산중으로 들어가 옹기장사를 했었다.

이곳의 조선시대 행정지명은 도점촌(陶店村), 즉 도자기 굽는 곳이다.


1802년 남한산성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순교자도 충청도 홍주에서

경기도 광주(廣州) 산골로 이사하여 옹기장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 최양업 토마스의 아버지로서 1839년 기해박해 때

곤장을 맞고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군 다랫골 출신으로

서울,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 수리산 뒷듬이마을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았었다.


한국 천주교가 설립한 가장 오래된 학교가 있었던 경기도 화성군 왕심리도

기해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이 옹기를 구우며 삶을 꾸려가던 곳이다.


1798년 순교한 이도기(李道起)가 체포된 곳도 충청도 정산(定山) 옹기 마을이었다.


강원도 최초의 본당인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의 아름다운 풍수원성당도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더욱 심해진 박해에서 도피한 신자들이 모여

화전(火田)을 일구고 옹기를 굽던 곳이다.


무형문화재 옹기장 박재환(요셉)옹은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점촌(店村)마을에서 태어나

6대째 전통 옹기 도공의 가업을 이어가는 6대째 가톨릭이다.

토기를 굽는 마을을 점촌(店村)이라 불렀는데

이 점촌마을도 박해 때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의를 표한 지 6년 만인 1998년

로마 교황청의 승인으로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옹기장학회’를 설립했다.

“주님 말씀을 질그릇에 담아 전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


<馬丁>



  • 구달 2011.06.12 16:49

    옹기, 그랬지.

    아버님의 고향,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 오감마을,

    그곳도 옹기촌이었어. 

    육이오사변때 다친 사람 하나 없었던 철저한 공동체, 

    서로 도우며 살던 캐돌릭 마을이었지.

    좋은 글 고맙네. 


    月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