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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67 성녀 잔 다르크 (Jeanne d’Arc)



프랑스와 영국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쟁했다.

이를 백년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의 시발은 잉글랜드 플랜태저넷왕가와

프랑스 발루아왕가 사이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이었다.

프랑스 카페왕가 11대 왕 필리프 4세에게는 많은 아들딸이 있었다.

그 중 한 딸이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왕가로 시집 가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녀가 ‘프랑스의 암늑대’로 불리는 이자벨 왕비이다.

이자벨 왕비는 유약한 남편 에드워드 2세를 몰아내고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히는 등 상당히 정치적이며 과격한 행동파였다.

에드워드 3세도 어머니를 닮아 욕심 넘치는 성격이었다.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모두 후사 없이 사망하여

샤를 4세를 끝으로 카페왕조는 직계가 끊어졌다.

왕위는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에게로 넘어갔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이므로

발루아가보다 카페왕조의 직계에 가까웠다.

에드워드 3세가 발루아가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면서 분쟁이 일어났고

한차례 승복과 번복 과정을 거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

거기에다가 필리프 4세 때부터 분쟁거리였던

프랑스 내 잉글랜드 소유 영토 문제도 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두 나라는 전쟁을 시작하여 프랑스 왕이 인질이 되기도 하고

잉글랜드 왕조가 헨리 4세에 이르러 랭커스터가로 바뀌고서도

휴전과 개전을 거듭하며 계속되었다.


전쟁은 거의 1백년이 지나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 발루아왕가의 샤를 6세가 정신질환으로 뒷자리로 물러나자

프랑스 내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샤를 6세 사망 이후 오를레앙 공작이 왕세자를 편들자,

이에 대립하는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군과 동맹함으로써

한동안 휴전 상태였던 백년전쟁은 재개되었다.


부르고뉴 쪽은 왕세자가, 어머니 이자보왕비와

삼촌 오를레앙 공작 사이의 자식이라며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여섯 살 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를 결혼시켜

프랑스 왕위를 잉글랜드에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전쟁에 열세인 샤를 왕세자는 프랑스 북부 지역을 잃어버리고,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군에 밀려

프랑스 남부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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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잔 다르크이다.

1백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프랑스 땅은 초토화되었고

백성들은 왕가의 다툼에 병사로 동원되어 의미 없이 죽어갔다.

프랑스 사람들은 잉글랜드군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국가보다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던 당시의 백성들은

백년전쟁을 통해 어렴풋이 국가의식이 생기기 시작했고,

구심점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애국심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때맞춰 잔 다르크가 등장한 것이다.


잔 다르크는 1412년 1월 6일 프랑스 동북부 샹파뉴(Champagne) 근처 

동레미(Domremy)에서 가톨릭 신자인 소작 농부의 다섯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동레미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이고

부르고뉴 공국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어 분쟁이 심하던 지역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독실했던 잔 다르크는 13살 즈음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

대천사 미카엘이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와

안티오키아의 성녀 마르가리타와 함께 나타나

오를레앙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군대를 몰아내라고 말했다.


1429년 잔 다르크는 적진을 뚫고 샤를 왕세자를 만났다.

왕세자는 낡은 옷을 입고 신하들 속에 섞여있었고

가짜 왕세자를 왕좌에 앉혀놓았다.

잔 다르크는 가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샤를 왕세자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사의 계시를 받아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하고

샤를 왕세자를 즉위시키겠다고 선서했다.


종교지도자들의 테스트를 통과한 잔 다르크는

왕세자군의 통솔권을 받아, 흰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를 지휘했고

프랑스 군은 치솟은 사기로 영국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무모한 전투에서도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

마침내 랭스지역을 수복하고 왕세자를 샤를 7세로 즉위시켰다.


즉위 후 안이해진 샤를 7세는, 파리 탈환으로 영국군을 완전 축출하자는

잔 다르크의 말을 무시한 채 1년을 허송하다가,

전열을 가다듬은 잉글랜드군의 재공격을 받게 된다.

잔 다르크의 인기를 시기한 샤를 7세와 귀족들은

잔 다르크의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잔 다르크는 결국 콩피에뉴 전투에서 패배, 부르고뉴 군대에 사로잡혔다.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 군대에 팔아 넘겼고

잉글랜드는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의 몸값으로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몸값을 치르지 않았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곱 번의 재판 끝에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의 죄를 뒤집어썼다.

신의 중개자인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없으므로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그녀는 이단이라는 것이었다.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루앙 광장에서 19세 꽃다운 나이에 화형당했다.


백년전쟁은 1453년 프랑스 왕가와 부르고뉴가의 극적인 화해로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끝났다.

샤를 7세는 1456년 잔 다르크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같은 해 교회는 잔 다르크를 유죄 판결한 재판을 무효화했다.


잔 다르크는 1909년 4월 1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됐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제2 수호성인이다.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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